[천자칼럼] 삐라
2차대전 때 독일에 삐라(전단)를 뿌리던 연합군 조종사들은 자신을 ‘휴지 배달부’라고 불렀다. 아무 성과도 없을 거라고 여긴 것이다. 차라리 지나가는 게슈타포 머리 위에나 떨어지라며 뭉치째 투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경험은 훗날 독일 본토 폭격의 핵심 전술로 활용됐다. 삐라의 효용은 고대 이집트에서 도망간 노예를 잡는 것부터 종교개혁 때 교황의 위선을 풍자하는 것까지 다양했다.

어원은 명확하지 않다. 광고용 포스터라는 뜻의 영어 빌(bill)이 일본어에서 변형된 것이라는 게 다수설이다. 히라(片)라는 발음과 결합해 ‘비라’ ‘삐라’로 경음화됐다는 설도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선전이나 광고 또는 선동하는 글이 담긴 종이쪽. ‘알림 쪽지’로 순화’라고 풀이돼 있지만, 삐라라고 하면 어딘지 부정적인 냄새가 난다. 주로 정치적 프로파간다를 목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아 군사용이나 체제선전용으로 활용됐기 때문이다.

문학작품에도 그런 분위기가 배어 있다. ‘아무래도 농지 개혁 삐라는 이쪽과 우리 쪽의 실례를 샅샅이 들어 소작인들 스스로가 현 실태를 깨닫게 해 주는 게 효과가 있을 것 같아.’(김원일 소설 ‘불의 제전’), “삐라를 한꺼번에 많이 뿌릴려면 여러 동무들이 들어가서 분공해야 되지 않겠어요?”(이기영의 ‘두만강’)….

삐라는 6·25와 빨치산 토벌 등을 거치면서 심리전의 주요 도구로 쓰였다. 학교에서는 이를 발견하는 즉시 신고하도록 교육했다. 연필과 공책 등 현상금도 줬다. 삐라를 줍기 위해 산과 들을 누비던 추억이 아스라하다.

북한이 삐라 전략을 접은 것은 남북의 국력차가 너무 벌어진 뒤부터였다. 뿌려봐야 효과가 없고 비용도 만만찮았다. 그래서 아이디어를 짜낸 것이 인터넷 삐라다. 일명 ‘얼짱 여대생’ 박진주가 공짜집에서 쌀밥 먹으며 잘 산다면서 체제를 자랑하고 자본주의 사회를 욕하는 ‘자랑 이야기’ 영상 같은 게 그렇다.

한국에서는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정부 차원의 삐라 살포는 중단했지만, 천안함 피격 이후 민간단체가 다시 보내기 시작했다. 탈북 과학자들 덕분에 기술이 좋아져 시한장치가 달린 풍선 하나당 1만~6만장씩 평양까지 날려보낸다.

그 효과가 워낙 커 북한 지도부가 골머리를 앓는다고 한다. 결국 북한군이 풍선을 향해 남으로 총질을 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얼마나 다급했으며 그랬을까 싶다. 그러나 주로 탈북인사들이 중심이 돼 날리는 삐라다. 고향의 동포들에게 진실을 알리려는 자유인들의 절규이기도 하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