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마라토너’ 이봉주(오른쪽)가 정구학 부국장과 함께 성화가 타오르는 인천 아시안게임 주경기장 밖을 뛰고 있다. 정 부국장은 뛰는 내내 손에 녹음기를 들고 대화 내용을 담았다. 김병언 기자 misaeon@hankyung.com
‘국민마라토너’ 이봉주(오른쪽)가 정구학 부국장과 함께 성화가 타오르는 인천 아시안게임 주경기장 밖을 뛰고 있다. 정 부국장은 뛰는 내내 손에 녹음기를 들고 대화 내용을 담았다. 김병언 기자 misaeon@hankyung.com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인간은 달린다.’

1952년 헬싱키올림픽 중장거리와 마라톤에서 금메달 3개를 딴 ‘인간 기관차’ 에밀 자토펙(체코)의 말이다. 우리 몸의 진화 상태는 사냥감을 쫓아 달리던 원시생활에 머물러 있다. 자연 속에서 달리면 몸과 마음이 하나가 돼 엔도르핀이 나오는 이유다. 의사이자 철학자, 아마추어 마라토너였던 조지 쉬언은 ‘달리기와 존재하기’란 책에서 “달리기를 통해 내 몸과 정신을 내가 원하는 곳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고 말했다.

최장의 달리기 종목인 마라톤. 완주자들은 한계를 뛰어넘는 고통 속에서 희열을 맛본다. 고독하게 몇 시간을 뛰면서 별의별 생각을 하기도 한다. 2009년 은퇴한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44). 인천 아시안게임 육상 심판으로 활동 중이던 그를 지난달 26일 오후 5시 인천시 서구 연희동 아시안게임 주경기장 밖에서 만나 함께 뛰면서 인터뷰했다. 조금 뛰면서 포즈만 잡아도 된다고 사진기자가 말했지만 둘은 1시간 동안 경기장 주변 10㎞를 뛰면서, 가쁜 숨을 쉬며 대화를 나눴다.

▷달리면서 인터뷰한 적이 있나요.

“최초예요(하하). 스트레칭부터 하죠.”

▷입은 운동복은 산 건가요. 협찬받은 건가요.

“협찬이 많죠.”

▷42.195㎞를 뛰는 풀코스에서 32~35㎞ 구간을 ‘마라톤 벽’이라고 하는데 엘리트 선수도 아마추어처럼 힘듭니까.

“마찬가지죠. 30㎞까지는 선수들이 거의 뭉쳐서 가잖아요. 여기를 넘어가면서부터 한 명씩 떨어져 나가죠. 이 구간이 가장 힘듭니다. 이 고비를 뛰어넘으면 좋은 성적을 내는 거죠.”

▷고비를 뛰어넘는 비결은.

“많이 뛰는 겁니다. 연습량이죠. 얼마만큼 땀을 흘렸는지에 따라 차이가 나요.”

▷이 선수가 쓴 자서전 ‘봉달이의 4141’(풀코스를 41번 완주하고, 책을 펴낸 2010년에 41살이라는 뜻)에 보면 ‘죽기 살기로 달린다’고 썼는데.

“그게 승부근성이죠.”

▷이 선수의 강점은.

“저는 승부욕이 많은 것 같아요. 뭔가 하면 남들한테 지기 싫어하는 게 있어요.”

▷막판 스퍼트할 때 ‘몸이 으스러져도 좋다’고 생각합니까.

“앞뒤 볼 것 없이 무조건 뛰는 거죠. 젖먹던 힘까지 쓰는 거죠. 하하.”

▷정신력 싸움인가요.

“에너지가 다 빠진 상태에서 정신력 하나만 갖고 뛰는 겁니다.”

▷풀코스를 44번 도전해서 세 번을 포기했는데. 막판에 다리가 안 들릴 때가 있었습니까.

“컨디션이 정말 안 좋을 때는 골인 지점이 저기 보이는데, 다리가 안 떨어질 때가 있죠.”

▷그럴 땐 어떡합니까.

“그래도 가는 거예요. 질질 끌면서 가는 겁니다.”

▷출발할 때 무슨 생각을 합니까.

“‘포기 않고 끝까지 완주해야겠다’고 다짐하죠.”

▷뛰다 보면 선수도 러너스 하이(runner’s high·어느 정도 달리면 얻는 도취감)가 있나요.

“에이, 저희는 그런 거 없어요. 출발하자마자 빠른 스피드로 가는 건데요. 러너스 하이는 천천히 조깅하는 사람들이 느낄 겁니다.”

▷2000년 도쿄 국제마라톤대회에서 세운 한국 최고기록 2시간7분20초를 뛰려면 100m를 18초15 페이스로 422번을 뛰어야 하는데.

“쉬운 스피드는 아니죠.”

▷선수 시절 얼마나 훈련을.

“날마다 오전에 20㎞, 오후에 20㎞ 늘 평균 30~40㎞씩 소화했어요.”

▷자서전에서 ‘훈련은 몸에 길을 내는 것’이라 했는데.

“숱한 고비를 넘는다는 뜻입니다. 훈련을 통해 길을 닦는 거죠.”

(이 선수는 책에서 ‘마라토너는 몸과 소통하는 사람이다. 한계에 도전하는 만큼 정신력이 중요하지만 정신력을 현실에서 실현시키는 건 몸이다. 반대로 체력보다 정신력이 약하면 마라토너로서 자질이 부족하다. 마라토너는 몸이 도달할 수 있는 최대치를 정신력으로 끌고 가는 사람’이라고 썼다.)

▷뛸 때 무슨 생각을 합니까.

“훈련 과정도 떠올리고, 힘들 때는 부모님도 생각나죠.”

▷부모님 떠올릴 땐 힘이 났나요.

“큰 힘이 됐습니다. 포기하고 싶어도 쉽게 포기할 수 없죠.”

▷2001년 봄 보스턴마라톤대회를 한 달 앞두고 아버님이 돌아가셨는데.

“뛰면서 아버지한테 계속 얘기했어요. ‘힘을 주세요. 영전에 꼭 보스턴 우승컵을 바치겠습니다’고요.”

▷사진을 보면 결승선을 첫 번째로 통과(2시간9분43초로 우승)할 때 손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던데.

“몸이 완전히 다운된 상태에서 훈련을 했어요. 대회에선 마음으로 ‘도와 달라’고 하니까, 제가 우승할 실력이 아닌데 뭔가가 도와준 거죠.”

▷프로 선수들은 아무 생각 없이 ‘죽자 살자’ 뛰는 줄만 알았는데.

“뛰다 보면 다 그런 생각이 들잖아요. 마라톤 내내 레이스에만 집중하면 스트레스 받으니까요.”

▷기분 좋은 것도 생각합니까.

“예전에 잘 뛰어서 결승선을 넘을 때 느꼈던 짜릿한 환희를 떠올리죠.”

▷가장 기쁜 기억은.

“한국 최고기록을 세운 도쿄 국제마라톤대회나 51년 만에 한국인으로서 우승한 보스턴 국제마라톤대회 같은 게 다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죠. 1996년 미국 애틀랜타올림픽에서 3초 뒤져서 아슬아슬하게 은메달 땄던 건 아쉽고요.”

▷1989년 전국체전 때 10㎞ 단축마라톤에서 동메달(당시 금메달은 황영조)을 따서 대학갈 수 있었던 게 기억에 남을 텐데.

“그 대회가 제게는 최고의 기회를 만들어줬죠. 그게 계기가 돼 오늘의 제가 있는 거죠. 만약 고교 3학년 때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메달을 못 땄으면 아마…. 다행히 3위를 차지해 특기생으로 대학에 갈 수 있었어요.”

▷그때 메달을 못 땄으면 지금 농사 짓고 있을 수도 있겠네요.

“그럴 거예요. 메달을 못 땄으면 다른 길로 갔을 거예요(웃음).”

▷코오롱팀의 정봉수 감독(작고)이랑 헤어지고 나와서 2000년 도쿄 국제마라톤대회에서 한국 최고기록을 세울 때 어땠어요.

“보령에 오인환 감독님이랑 전지훈련 가서 고생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선수생활을 마감할 수도 있던 때였죠. 소속팀도 없고, 스폰서도 없어서 사비를 다 털어서 훈련했어요.”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셈이네요.

“한 끼에 4000원짜리 밥을 먹고 읍내 허름한 여관방에서 예닐곱 명이 자면서 훈련했어요. 제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연습한 때죠.”

▷영광 뒤에는 힘든 시절이.

“돌이켜보면 고비마다 오뚝이처럼 쓰러질 듯하면서 다시 일어나곤 했죠.”

▷정말 100m를 달리면 14초대에 뛰었습니까.

“14~15초대에 뛰었어요. 마라토너 가운데 스피드가 가장 느린 선수였을 겁니다.”

▷단점을 어떻게 극복했나요.

“어렸을 때부터 제 몸을 잘 알았어요. 학교 운동회에서 8명이 뛰면 4~5등을 해서 달리기로 상장을 탄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게다가 짝발과 평발이었죠.”

▷천안농고에서 왜 육상부에 들어갔습니까.

“정식 육상부도 아니고 1주일에 한두 번 모여 뛰는 특별활동이었어요. 아침마다 집에서 학교까지 1시간 이상 뛰어가면서(책가방은 버스를 타고 다니는 선배가 들어줬음) 1년 정도 하다 보니 실력이 늘고 재미도 붙었어요.”

▷어떻게 본격적인 육상선수가 됐나요.

“천안농고 3학년 선배가 인천체육전문대학에 합숙훈련 가는데 따라오라고 하더라고요. 합숙훈련 가서 선배들하고 체계적으로 뛰다보니깐 실력이 부쩍 늘었어요.”

▷행운이었네요.

“그때 예산의 삽교고등학교 3학년 선배가 같이 훈련하고 있었어요. 제가 열심히 하는 걸 보고 자기네 학교로 전학오라고 하더라고요. 1학년으로 다시 입학하라는 조건이었습니다.”

▷삽교고등학교에 가서는.

“전문 코치한테 배워서 그때부터 전문적인 선수가 될 수 있었어요. 뭐 그것도 잠시였지만(한숨). 학교 재정이 어려워져서 1년 만에 육상부가 해체돼 황당했죠. 부모님 반대를 무릅쓰고, 어렵게 어렵게(허탈한 목소리로) 1년을 꿀어서 갔는데….”

▷힘들면 그 충격이 떠오르겠네요.

“생각 많이 나죠. 선수들은 육상부를 다 떠나거나 일반 학생으로 가고 저 혼자만 남았어요.”

▷‘인생 선택 잘못했나’ 하고 후회했겠네요.

“다행히 홍성의 광천고로 다시 전학갔죠.”

▷인생이 드라마틱합니다.

“많이 드라마틱하죠. 저는 운동을 늦게 시작한 편이잖아요. 그래서 훈련량이 남들보다 두 배는 넘어야 한다고 늘 생각했어요. 새벽 5시에 일어나야 할 때도 다른 선수들이 자고 있을 때 더 빨리 일어났어요. 훈련 욕심이 많았죠.”

▷훈련할 때 특별한 걸 먹습니까.

“특별한 건 없고 한약이나 보양식을 먹긴 했죠. 예전에는 뱀도 먹었잖아요.”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서 이 선수와 남녀 마라톤에서 각각 우승한 북한 함봉실 선수에게 나중에 미국 달러를 몰래 줬더니 구렁이를 선물로 받았다던데.

“그때는 와, 봉실이가…하하하(그때 생각하면 웃음이 계속 나는듯).”

▷어땠길래.

“전지훈련 간 중국 쿤밍에서 다시 만났을 때죠. 한여름이라 더웠어요. 우리나라 같으면 스티로폼으로 만든 박스로 진공포장을 했을 텐데 밀폐 상자에 담아 와서 ‘오라버니 동무, 구렁인데 암수 한 쌍을 먹어야 힘을 쓸 수 있습네다’ 하고 주더라고요. 하하하. 국내 한약방에 가져갔는데 상해서 버렸어요.”

▷뱀을 먹으면 효과가 있던가요.

“그냥 기분이죠, 뭐. 몇 번 먹은 적은 있어요.”

▷대회 때 뭘 마십니까.

“5㎞마다 생레몬을 담근 물을 마시는데 갈증 해소에 좋아요.” (30분 경과. 이 선수도 몸은 가볍게 뛰면서도 대화하느라 헉헉거림.)

▷이 선수의 쌍꺼풀 수술이 생각나네요. 흐르는 땀이 눈에 안 들어가게 하려고 수술했다고 언론에 보도됐는데, 실은 눈을 크게 하려고 했다면서요.

“하하하. 누님이 수술하는 게 어떠냐고 하길래 제가 하고 싶다고 했죠.”

▷마라톤의 매력은.

“저 같은 경우는 힘들게 땀을 쫙 흘리고 나서 샤워할 때 기분, 자기 목표를 달성했을 때 성취감이 좋아요.”

▷인생도 마라톤이라고 생각합니까.

“마라톤은 짧은 시간에 이뤄지는 게 아니죠. 긴 시간 동안 오르막과 내리막도 있고, 뛰다 보면 그런 순간을 극복해야 하잖아요.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나 스스로 해야죠.”

▷아마추어들 뛰는 것 보면 어떤가요.

“너무 열심히들 하세요. 건강을 위해서 해야 하는데 100회, 200회, 300회 마라톤을 완주하는 분을 보면, 하하(웃음). 우리 엘리트 선수들은 1년에 두 번밖에 못 뛰거든요.”

▷뛰다 보면 배가 많이 고픈데.

“예전에 어느 마라톤대회에서 후배가 골인하고 나서 이만한(손으로 큰 원을 그리며) 배를 다 먹는데 얼마나 웃기던지. 배 고프고 탈진도 하고, 하하하.”

▷대회를 앞두고 식이요법은.

“고행의 길을 걷는 거죠. 사흘간 하루 세끼 고기와 물만 먹어요. 시합 직전엔 탄수화물만 먹고요.”

▷(1시간 경과) 팬티 하나 입고 시작했는데, 부(富)는 이뤘다고 생각합니까.

“부요? 제가 형님한테 집 한 채와 분당 세탁소도 장만해드렸고요. 고향에 있는 어머님께 양옥도 새로 지어드렸고요. 무엇보다 국민들한테 사랑받은 게 성공한 거죠.”

"IOC위원 기회 생기면 영조에게 절대 양보 못해"

1970년생 동갑내기 마라토너인 이봉주와 황영조는 20여년간 우정과 경쟁을 이어오고 있다. 천부적인 소질을 지닌 황영조와 노력형인 이봉주는 현역 선수 시절 네 번 맞붙어서 3승1패로 황 선수가 앞섰다. 황영조는 전성기를 일찍 맞았고, 이봉주는 늦게 맞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같은 코오롱팀 시절 황영조가 중학교 동창을 이봉주한테 소개해 결혼했을 정도로 두 선수는 친분이 두텁다.

▷친구인 황영조 선수는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며 쨍하고 떴다가 얼마 안 가 은퇴했는데.

“영조의 어머니가 해녀 출신이에요. 제주도 분인데 삼척으로 시집을 간 거죠. 뛰어난 폐활량을 가진 황 선수가 어머니 영향을 많이 받았겠죠.”

▷이 선수의 부모님은 농부였는데, 레슬링한 형 말고 운동하는 사람이 집안에 있었습니까.

“없었어요. 누님 두 분도 평범했고요.”

▷은퇴 후에는 스포츠 행정가를 꿈꾼다고 했는데 혹시 육상연맹회장 같은 자리인가요.

“그런 게 될 수 있죠.”

▷선수 출신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은 어떤가요.

“나중에 뭐 기회가 되면요.”

▷황영조 선수도 IOC 위원이 꿈이라고 하던데, 둘이 경쟁하면 양보할 겁니까.

“에이, 양보할 수 없죠.”

▷‘먼저 하라고 하죠, 뭐’ 라고 말할 줄 알았는데.

“아이, 그게 뭐 제가 하려고 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닌데요.”

▷요즘도 매일 뛰나요.

“수원 영통의 집 근처 경희대 뒷산의 제 코스에서 혼자 10~15㎞ 정도 뜁니다.”

▷은퇴했는데 뭐하러.

“이제는 뭐 제 건강이죠.“

▷이 선수가 ‘봉주 치킨’(선배와 함께 하는 사업) 많이 먹어서 배 나올 줄 알았는데.

“하하하.”

▷지금 풀코스를 뛰면 기록이.

“지금 뛰면요? 2시간30분대요.”

■ 이봉주 프로필

1970년 충남 천안 출생. 168㎝에 선수시절 57㎏. 천안농고 1학년 때 특별활동으로 육상을 시작, 고교 졸업 때까지 중장거리 선수로 뛰었다. 우여곡절 끝에 삽교고, 광천고 등 세 군데 고등학교를 다닌 뒤 서울시청팀에 입단하면서 마라톤을 본격 시작했다. 서울시립대 졸업. 하프마라톤 한국 최고기록(1시간1분4초, 1992년 도쿄하프마라톤대회)과 마라톤 풀코스 한국 최고기록(2시간7분20초, 2000년 도쿄국제마라톤대회) 보유. 2009년 서른아홉 살에 은퇴할 때까지 20만㎞(지구 네 바퀴)를 훈련해 풀코스 41번 완주, 국내외 대회에서 열 차례 우승하고 여섯 번 준우승했다.


편집국 부국장 c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