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다정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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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깨달은 글에 담긴 온기
어두운 터널 속 이들에게 전했으면…
강유정 <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 >
어두운 터널 속 이들에게 전했으면…
강유정 <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 >
스트레이트 앤드 심플(Straight & simple).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계정 자기 소개란에 써둔 두 개의 형용사다. 모름지기 좋은 문장이란 솔직하고 단순해야 한다. 미사여구에 숨거나 흐릿한 서술어 속으로 빠져드는 게 아니라 생각하고 있는 바를 분명히 표현하는 것, 바로 그게 문장가의 윤리라고 생각한다.
솔직하고 단순한 문장을 쓰기 위해서는 우선 몇 가지 생활 태도가 요구된다. 날카롭게 관찰하는 것이 하나이고 구체적으로 기억하는 것이 두 번째다. 어떤 대상을 볼 때 명사로 뭉뚱그려 보는 게 아니라 형용사로 세세히 살피고, 그 섬세한 관찰을 문장으로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 어떤 대상이 문장 가운데서 무너지거나 훼손되지 않는다. 좋은 글이란 무릇 구체적이고 군더더기가 없어야만 한다.
글은 사람의 반영이라고 한다. 정신의 표현이기도 하다. 솔직하고 단순하게 적기 위해서는 사고 역시 단정히 해야 한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스트레이트와 심플이라는 형용사에서는 체온을 느낄 수가 없다. 옳은 말이기는 하나 냉정하다. 솔직하고 단순한 문장은 고고하지만 부드럽거나 따뜻하지는 않다. 사람의 온기를 느끼긴 어렵다는 의미다.
좋은 글이란 단정하고 차가워야 한다는 생각엔 여전히 큰 변화가 없다. 하지만 분명 글에도 온도가 있다. 옳다는 것과 따뜻하다는 것은 같은 무게로 잴 수 없는 가치다. 그런데 어쩌면 난 옳은 것만을 생각한 나머지 온도를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아니 오히려 뜨거워선 안 된다고 스스로 온기를 버리기도 했다. 좋은 문장을 지나치게 좁게 생각했던 것이다.
문장이 사람의 반영이라면 아마 따뜻한 문장의 주인은 사람도 꽤나 따뜻할 듯싶다. 빙긋 웃어 보일 수 있는 그런 여유를 보이는 글. 돌이켜보면 내겐 바로 그 여유가 없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내 것처럼 여기기에는 자기 연민이 앞서고, 나눠줄 온기를 생각하기엔 스스로가 너무 춥다고 느낀 것일지도 모르겠다.
글에도 애교가 있고, 정이 있고, 걱정이 있고, 위로가 있다. 행간마다 온도가 서릴 수 있다. 왜 진작 알지 못했을까. 너무 쉽게 다정한 글들을 뜨겁다 비판하고, 넘친다 외면했던 것은 아닌지 되돌아본다. 만일 내가 지나왔던 그 어둡고 차가운 시간의 터널을 지나는 이들이 있다면 이제는 조금이라도 온기를 보탤 그런 글을 써보고 싶다. 글은 따뜻하면서도 단정할 수 있다. 사람이 그럴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강유정 <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 noxkang@hanmail.net >
솔직하고 단순한 문장을 쓰기 위해서는 우선 몇 가지 생활 태도가 요구된다. 날카롭게 관찰하는 것이 하나이고 구체적으로 기억하는 것이 두 번째다. 어떤 대상을 볼 때 명사로 뭉뚱그려 보는 게 아니라 형용사로 세세히 살피고, 그 섬세한 관찰을 문장으로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 어떤 대상이 문장 가운데서 무너지거나 훼손되지 않는다. 좋은 글이란 무릇 구체적이고 군더더기가 없어야만 한다.
글은 사람의 반영이라고 한다. 정신의 표현이기도 하다. 솔직하고 단순하게 적기 위해서는 사고 역시 단정히 해야 한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스트레이트와 심플이라는 형용사에서는 체온을 느낄 수가 없다. 옳은 말이기는 하나 냉정하다. 솔직하고 단순한 문장은 고고하지만 부드럽거나 따뜻하지는 않다. 사람의 온기를 느끼긴 어렵다는 의미다.
좋은 글이란 단정하고 차가워야 한다는 생각엔 여전히 큰 변화가 없다. 하지만 분명 글에도 온도가 있다. 옳다는 것과 따뜻하다는 것은 같은 무게로 잴 수 없는 가치다. 그런데 어쩌면 난 옳은 것만을 생각한 나머지 온도를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아니 오히려 뜨거워선 안 된다고 스스로 온기를 버리기도 했다. 좋은 문장을 지나치게 좁게 생각했던 것이다.
문장이 사람의 반영이라면 아마 따뜻한 문장의 주인은 사람도 꽤나 따뜻할 듯싶다. 빙긋 웃어 보일 수 있는 그런 여유를 보이는 글. 돌이켜보면 내겐 바로 그 여유가 없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내 것처럼 여기기에는 자기 연민이 앞서고, 나눠줄 온기를 생각하기엔 스스로가 너무 춥다고 느낀 것일지도 모르겠다.
글에도 애교가 있고, 정이 있고, 걱정이 있고, 위로가 있다. 행간마다 온도가 서릴 수 있다. 왜 진작 알지 못했을까. 너무 쉽게 다정한 글들을 뜨겁다 비판하고, 넘친다 외면했던 것은 아닌지 되돌아본다. 만일 내가 지나왔던 그 어둡고 차가운 시간의 터널을 지나는 이들이 있다면 이제는 조금이라도 온기를 보탤 그런 글을 써보고 싶다. 글은 따뜻하면서도 단정할 수 있다. 사람이 그럴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강유정 <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 noxkang@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