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킨게임' 돌입한 원유시장…국제 유가 하락 어디까지
국제 유가의 하락세가 심상치않다. 경기 둔화 우려 속에 수요는 줄고 있는 데 반해 공급은 늘어나면서 연일 최저가를 고쳐 쓰고 있다.

투자업계에서는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 국가들이 미국, 러시아 등 非OPEC 산유국을 겨냥해 원유 생산을 필요악으로 늘리는 '치킨게임'(수익성 고려하지 않는 출혈경쟁)에 돌입한 것으로 보고 있다.

셰일가스 붐으로 원유 생산량이 늘어난 이들 경쟁자를 밀어내기 위해 가격을 떨어뜨려서라도 점유율을 지키고자 한다는 것.

이에 따라 국제 유가가 당분간 하락세를 이어가 배럴당 70달러 중반대까지 떨어질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 넘쳐나는 美 원유재고…OPEC 의도적 증산

22일(현지시간)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12월 인도분 WTI는 전날보다 1.97달러(2.4%) 떨어진 배럴당 80.52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이는 2012년 6월 28일 이후 가장 낮은 가격이다.

이날 미국에너지정보청(EIA)은 지난 17일 기준 미국의 원유 재고가 1주일전에 비해 711만 배럴 증가했다고 밝혔다. 270만 배럴 증가를 점쳤던 시장 전문가들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은 것으로, 세계 원유 수요가 감소할 것이란 전망과 맞물리면서 유가 하락을 이끌었다.

런던 석유거래소(ICE)에서 북해산 브렌트유도 전날보다 1.51달러 내린 84.71달러에 마감했다. 국내 원유 수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두바이유는 지난 21일(현지시간) 기준으로 배럴당 84.33달러를 기록했다.

국제 유가는 지난 달부터 줄곧 하락세를 이어오고 있다. 다만 초기 유가 하락이 달러화 강세와 세계 경기 둔화에 따른 하락이었다면 최근엔 OPEC 국가들의 의도적인 생산 증가(증산)에 원인이 있다는 게 투자업계 분석이다.

셰일가스 생산이 용이해지면서 미국의 원유 생산량이 30여년 만에 최고 수준까지 오른 게 OPEC 국가의 증산을 부추겼다는 설명.

천정훈 키움증권 연구원은 "이전과 다르게 최근 OPEC은 최대 산유국인 미국과 러시아를 겨냥해 감산 대신 박리다매를 통한 치킨 게임 전략을 택했다"며 "쿠웨이트 뿐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 또한 유가가 80달러로까지 하락하는 것을 상당 기간 용인할 태세"라고 설명했다.

실제 사우디아라비아는 최근 유가 급락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하루 10만 배럴을 추가 생산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는 1985년 감산 조치로 다른 산유국에 증산 기회를 제공했던 실수를 번복하지 않겠다는 의도로 시장은 보고 있다.

천 연구원은 "생산원가를 맞추지 못하는 산유국들의 감산 유도를 겨냥한 것"이라며 "중장기적으론 안정적인 고유가 형성을 목표로 단행한 조치"라고 분석했다.

앞서 알리 알 오마이르 쿠웨이트 석유장관은 "최근 유가 하락에도 OPEC 국가들이 감산에 나설 것 같지는 않다"며 "미국과 러시아의 원유생산 비용은 배럴당 76~77달러 부근"이라고 언급했다. 미국과 러시아가 생산원가를 감내하지 못할 때까진 유가 하락이 멈추지 않을 것이란 얘기다.

천 연구원은 "이번 유가 인하 경쟁으로 가장 타격을 입는 산유국은 미국과 사사건건 대립을 일으켰던 러시아일 것"이라며 "원유 의존도가 높은 경제 구조를 가진 러시아는 연일 이어지는 유가 하락으로 곤경에 처해있다"고 말했다.

◆ OPEC 카르텔 균열…유가 반등 관건은 '수요'

증산으로 인한 유가 하락 속에 OPEC 국가 카르텔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OPEC 내에서 통상 원유 생산을 억제해왔던 베네수엘라의 경우 인플레와 경기 침체를 겪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 유가 하락으로 디폴트(채무불이행)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다.

베네수엘라는 유가가 배럴당 85달러를 하회하자 OPEC에 긴급 회의를 요청했지만,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에 이어 이라크까지 원유 판매가를 낮추는 대열에 동참했다.

이은택 SK증권 연구원은 "부유한 OPEC 국가와 돈이 필요한 남미·아프리카 OPEC 국가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며 "일부 중동 정부가 종파분쟁에서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 재정지출을 크게 늘린 것도 원인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손재현 KDB대우증권 연구원은 "재정지출을 감당하기 위해선 '싸게 많이 파는 것'과 '비싸게 파는 것' 두가지 방법이 있다"며 "증산으로 방향을 잡은 일부 OPEC 국가들은 전자를 선택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국제 유가가 단기적으론 80달러 이하로 떨어질 것"이라며 "유가 하락을 가져온 건 공급과잉(증산)이지만 회복 여부는 '수요'에 달려있다"고 진단했다. 세계 경기가 회복돼 수요가 살아나야 유가 반등이 가시화될 것이란 판단이다.

유가 하락으로 인해 국내 증시에서 정유주와 항공주 희비는 엇갈리고 있다. 정유주는 정제마진 감소 우려가 큰 반면 항공주는 유류비용 절감 효과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김기태 LIG투자증권 연구원은 "대형항공사들은 유가 하락으로 이인 개선이 가능한 상황에서 4분기 화물 성수기가 다가올 것"이라며 항공주에 대한 비중을 확대할 것을 제안했다.

한경닷컴 권민경 기자 k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