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령 1000살이 넘는 고목들 사이로 100살이 넘은 빨간 디젤기관차가 달린다.
수령 1000살이 넘는 고목들 사이로 100살이 넘은 빨간 디젤기관차가 달린다.
가만히 풍경과 함께 흘러가고 싶을 땐 망설임 없이 기차여행을 떠나곤 한다. 대만 아리산 산림열차에서 마주한 장면들은 꿈결 같아서, 내내 “꿈이야 생시야?”라며 혼잣말을 내뱉게 한다. 깊은 숲 속 나무 기차역에 서 있으면 빨간 기차가 나를 태워가고, 기차에서 내리면 거대한 노송나무(편백)와 키 큰 삼나무 사이로 구불구불한 길이 펼쳐진다. 산림열차, 원시림, 그리고 운해 위의 일출을 보여주는 아리산은 꿈이라면 깨어나고 싶지 않은 ‘꿈 같은’ 여행지다.

동화의 숲으로 가는 아리산 산림열차

섬나라 타이베이에 이렇게 산이 많은 줄 몰랐다. 아리산은 하나의 산이 아니다. 타이베이 최고봉 옥산을 중심으로 한 18개의 산을 아울러 ‘아리산국가풍경구’라 부른다. 타이베이의 중부의 소도시 자이에서 기차로 3시간 반, 버스로 2시간 반을 꼬박 달려야 도착할 만큼 아리산국가풍경구의 범위가 넓다. 산으로 가는 버스에서 보는 풍경도 변화무쌍하다. 열대·온대·한대 등 서로 다른 삼림대가 눈앞을 스친다. 높이 올라갈수록 계단식 차밭이 이어진다. 타이베이의 명차(名茶)로 손꼽히는 고산 우롱차 밭이다.

굽이굽이 산등성이를 덜컹이며 오르는 버스 안에서도 멀미를 하지 않았던 것은 아리산에 가면 울울창창한 고목 사이를 달리는 산림열차를 탄다는 기대감 덕분이다. 인도의 다즐링 히말라야 철도, 페루의 안데스 철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 3대 고산열차다. 직접 타보면 세계 3대 고산열차라는 수식어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낭만적인 분위기가 감돈다. 해발 2216m의 아리산역에서 출발하는 산림열차는 해발 2138m인 신목행과 2274m인 주산행 두 종류. 신목행 열차를 타고 트레킹을 즐길 것이냐, 주산행 열차를 타고 일출을 보러 갈 것이냐는 여행자의 마음에 달렸다.
 나무로 만들어 더 운치있는 아리산역으로 가는 길.
나무로 만들어 더 운치있는 아리산역으로 가는 길.
한없이 청량한 숲으로 스며들다

주차장에서 산을 올려다 보니 아리산역이 빼곰 고개를 내민다. 설레는 마음을 누르지 못해 계단도 껑충껑충 뛰어 오른다. 나무 내음 가득한 플랫폼에 빨간 디젤 기관차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다. 기적 소리를 울리는 자오핑행 기차에 몸을 싣는다. 독특하게도 기관사가 뒤에서 열차를 밀고 올라가는 방식이다. 차창 밖으로 늠름한 삼나무의 행렬이 지나간다. 기차는 어느새 숲 사이로 난 철로를 지나 자오핑역에 선다.

고개도 숙이지 않고 거대한 나무 사이를 지나면 영화 <반지의 제왕> 속 호빗이 된 기분.
고개도 숙이지 않고 거대한 나무 사이를 지나면 영화 <반지의 제왕> 속 호빗이 된 기분.
자오핑역에서 내려 신목역까지가 본격적인 트레킹 코스. 산을 오른다기보다는 숲으로 스며드는 기분이다. 노송나무와 삼나무가 빽빽한 숲길은 영화 ‘반지의 제왕’의 배경을 닮았다. 키 큰 나무 사이로 떨어지는 한 가닥 빛줄기마저 그윽하다. 피톤치드 가득한 공기는 또 얼마나 청량한지. 나도 모르게 심호흡을 하게 된다. 함께 걷는 친구는 어느새 콧노래를 부르고 있다. 걷다 보니 청량한 공기를 머금은 초록 연못이 등장한다. 잠시 후 또 하나의 초록 연못이다. 동생연못과 자매연못이라는 이름의 메이탄과 쯔메이탄에는 전설 하나가 전해온다. 자매가 공교롭게도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됐는데, 동생을 위해 언니가 연못에 몸을 던지자 언니에게 미안한 마음에 동생마저 연못에 뛰어 들었다고 한다. 우애 깊은 자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초가지붕 2개를 올린 정자를 세웠다는 가슴 아픈 이야기다.

숲이 깊어갈수록 신비로운 풍경의 연속이다. 두 그루의 사이프러스가 만든 하트나무, 3대에 걸친 노송이 한데 얽혀 자라고 있는 삼대목 등 자연이 만든 작품 앞에 발길을 멈추게 된다. 어릴 적에 본 동화처럼 나무의 요정이 살고 있을 것만 같아 조심조심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모양은 다 달라도 수령은 1000년 이상 된 거목들이다. 1000년이 넘은 나무도 아리산 신목에 비하면 어린 축에 든다. 아리산 신목은 무려 2300년 동안 한 자리를 지켜온 나무다. 거대한 크기도 압도적이다. 그렇게 명장면 같은 대자연에 흠뻑 빠져 걷다 보니 어느새 산림보도가 끝나고 신목역에 이른다.
피톤치드 가득한 아리산 트레킹 코스.
피톤치드 가득한 아리산 트레킹 코스.
망망운해 위의 일출을 꿈꾸며

새벽 4시. 차디찬 공기가 피부에 닿는다. 어제와 같은 장소, 다른 풍경. 다들 어디에 숨었다 나왔는지 아리산역 앞은 주산행 일출열차를 기다리는 여행자들로 인산인해다. 서울 출근 시간의 지하철을 방불케 하는 풍경에 정신이 번쩍 든다. 아리산역에서 주산까지는 열차로 30분. 약 6.2㎞ 거리다.

기차에서 내리면 바로 앞이 전망대다. 모두들 산봉우리를 두른 운해 위로 떠오르는 주산의 장엄한 일출을 기대하고 여기까지 왔다. 운해는 가을에 자주 발생한다는 말에도 희망을 걸어본다. 하나, 구름의 바다 위에 해가 떠오르는 그림 같은 풍광을 볼 수 있는 확률은 10% 이하. 구름이 너무 많으면 해가 구름에 가리고, 구름이 없으면 밋밋한 일출이 연출된다. 멀리서 올라오던 붉은 빛도 잠시, 이내 날이 밝아 온다. 흐린 날씨 탓이리라 하면서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아직 보지 못한 아리산의 명장면 하나 마음에 품고 다시 기차에 오른다. 다음엔 꼭 만나게 되리라 되뇌며.

■여행팁

대만 어디서든 아리산은 큰맘 먹고 가야 할 거리라는 게 먼저 넘어야 할 산이다. 타이베이, 타이중, 가오슝 어디서 출발하든 아리산의 관문 자이역까지 이동한 후 버스로 2시간30분쯤 달려야 아리산에 도착한다. 아리산역이 산림열차 여행의 출발점.

신목행과 일출을 보러가는 주산행 두 가지가 있다. 신목행 열차는 아리산역에서 자오핑역, 선무역에서 아리산역을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하루 10회, 주산행은 그때그때 일출시간에 맞춰 하루 한 번 운행한다.

아리산(대만)=우지경 여행작가 travelette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