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학 한국섬유산업연합회 회장 은 “기업들이 자신만의 특화 분야를 찾아 세계적인 경쟁력을 키우는 게 우선 과제”라고 말했다. 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성기학 한국섬유산업연합회 회장 은 “기업들이 자신만의 특화 분야를 찾아 세계적인 경쟁력을 키우는 게 우선 과제”라고 말했다. 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사양 기업은 있어도 사양산업이란 것은 없습니다. 섬유가 왜 사양산업입니까. 사람이 옷 안 입고 살 수 있습니까?”

성기학 한국섬유산업연합회 회장(67·영원무역 회장)은 섬유산업 하면 꼭 따라붙는 ‘사양산업’이라는 표현이 나오자 이렇게 되물었다. 그는 “한국은 섬유산업의 무한한 잠재력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성급히 사양산업이라는 딱지를 붙였다”고 했다.

성 회장은 1974년 영원무역을 설립한 뒤 40년째 섬유·패션 한우물을 파온 기업인이다. 영원무역은 해외 4개국 5개 공장에서 6만여명이 근무하는 세계 최대 아웃도어·스포츠 의류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 업체다. 지금도 1년의 절반 이상을 해외 출장으로 보내는 그는 그동안 대외 활동을 자제했다. 그러던 그가 8월27일 5000여개의 회원사를 둔 국내 최대 업종 단체인 한국섬유산업연합회(섬산련)의 수장을 맡았다. 지난 20일 서울 만리동 영원무역 본사에서 만난 성 회장은 섬유산업의 재도약을 이끌 해법은 기업의 치열한 자기 혁신이라고 강조했다.

▷섬산련 회장을 맡은 지 두 달 정도 지났습니다.

“과거에도 섬산련 회장을 맡아 달라는 요청이 있었는데, 마음의 여유도 없고 제가 잘할 것 같지도 않아서…. 이제는 내가 할 역할이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한번 해보자고 했습니다. 국가경제 발전이란 측면에서 섬산련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 중입니다.”

▷섬유는 1970년대 한국 경제의 효자 노릇을 했지만 언제부터인지 사양산업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다닙니다.

“언어가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는데, 한국에서 섬유 하면 의복이나 직물 정도만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패션, 스포츠, 신발, 가죽, 산업섬유 등도 모두 섬유산업의 일부입니다. 세계적으로 기라성 같은 기업과 기업인이 많고, 여전히 성장 잠재력을 인정받고 있어요. 지금 스페인 최고 부자는 자라를 생산하는 인디텍스의 아만시오 오르테가 회장입니다. 일본 유니클로의 야나이 다다시 회장과 스웨덴 H&M의 스테판 페르손 회장은 또 어떻습니까.”

▷사실 국내 대표 기업 중에서도 섬유사업이 모태인 곳이 많습니다.

“우리 산업계에서 참 안타까운 점은 쏠림 현상이 너무 심하다는 것입니다. 좀 된다 싶으면 우르르 달려가고, 사양이라는 말이 나오면 깊이 생각도 안 하고 침몰하는 배에 탄 것처럼 얼른 옮겨 타야겠다고만 생각합니다. 사양이라고 한 번 라벨이 붙으면 은행에선 자금을 안 대 줍니다. 버릴 필요가 없는 것은 물론 앞으로 성장성이 있는데도 말입니다.”

▷외국도 섬유사업에 대한 분위기는 비슷하지 않습니까.

“며칠 전 대만 섬유박람회를 다녀왔는데, 작년 매출이 890억달러에 달하는 아시아 최대 석유화학 기업인 포모사그룹의 왕융칭 회장이 아침 일찍 와서 오전 내내 전시회장을 둘러보고 사람을 만나고 하더군요. 우리나라의 웬만한 중량감 있는 최고경영자(CEO)들은 한 번 쓱 보고 지나가면 다 아닙니까. 우리가 그만큼 깊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섬유산업 부활을 위해 제일 중요한 것은 뭘까요.

“섬유기업들이 열의를 갖고 끈질기게 붙어야죠. 그러면 답은 어디에 있느냐. 시장과 공장에 바로 답이 있습니다. 시장, 즉 고객이 무엇을 원하고 있고 공장에서 이걸 전사적 역량을 동원해 가장 효율적으로 만들어내는 방법을 찾는 것입니다. 스스로 시장을 개척하고, 고객을 최우선으로 하고, 그런 사람들이 잘 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부활 논리가 있겠습니까.”

▷정부 역할도 있지 않습니까.

“정부의 역할은 일관성을 갖고 전체적인 정책 협조를 해주는 것이죠. 하지만 국가가 나선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근본적인 답은 역시 시장과 공장에 올인하는 것입니다. 세계 섬유의 패러다임은 우븐(재킷·드레스 등에 쓰는 견고하게 짜인 소재)에서 니트(티셔츠 등에 쓰는 신축성 좋은 소재)로 많이 이동했습니다. 경기 양주, 포천, 동두천 양포동 등에서는 이런 흐름에 맞춰 자생적으로 특화한 업체가 많이 생겨나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반면 정부가 많은 보조금을 투입한 대구는 니트 분야 전환이 잘 이뤄지지 않았어요.”

▷기업의 ‘자력갱생’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군요.

“어떤 회사든 단체든 ‘국민의 혈세를 받아 어떻게 한번 해봐야겠다’는 생각으로는 세계적인 경쟁이 안 됩니다. 대만에 가니 어느 고위 인사가 이런 얘길 하더군요. 한국이 1999년 대구 지역의 섬유산업 중흥을 위해 ‘밀라노 프로젝트’를 국책사업으로 추진했을 때 대만 섬유업계 인사들이 심각한 위기감을 갖고 맨날 모여 회의를 했답니다. 결국 그들은 그런 프로젝트보다는 제품 개발과 고객 서비스, 가격 경쟁력 있는 생산 시스템에 투자하자는 데서 답을 찾았습니다. 지금은 대만 섬유산업이 성공해서 참 잘 되고 있습니다.”

▷영원무역은 ‘시장과 공장’ 부문에서 모두 잘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세계 정상을 유지하는 것일 테고요.

[월요인터뷰] 성기학 회장 "정부가 어떻게 섬유산업 살립니까…답은 시장과 공장밖에 없죠"
“저희도 매일 위기감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조금만 잘못하면 매출 떨어지고 이익률 떨어지고, 시장에서 ‘벌’받는 것은 순식간의 일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저더러 ‘회장님은 사업도 잘되고 하니 쉬엄쉬엄 하시죠’라고 얘기하는데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걸 뻔히 아는데 어떻게 그렇게 합니까. 그러니 지금도 밤 비행기 타고 와서 아침에 일하고 그러는 거죠.”

▷서울대 상대 66학번인데, 동기들은 대부분 학계나 금융계, 관계 등으로 진출하지 않았습니까.

“표학길 서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 박종수 금융투자협회장, 정운찬 전 국무총리, 김중수 전 한국은행 총재 등이 서울대 상대 동기입니다. 그때는 기업체에 가면 좀 떨어지는 사람으로 생각한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저는 은행 같은데 가는 게 적성에 안 맞았어요. 저는 사업이 ‘내추럴’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업이 ‘내추럴’하다는 말씀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사업을 하신 분입니다. 할아버지는 1920년대 마산에서 미곡 수출 사업을 하셨고, 선친은 경남 창녕에서 대규모로 양파 종자 사업을 하셨습니다. 열세 살 때부터 방학 때면 아버지 양파 농장에서 일했습니다. 양파를 선별해 시장으로 나르고, 일꾼들에게 아버지 메지시를 전하는 매니저 역할 같은 걸 한 거죠. 그때 선친께 배운 가르침이 지금도 인생의 최고 덕목으로 생각합니다. ‘정직’이죠.”

▷어릴 때부터 사업가 DNA를 물려받으셨네요.

“네 그런 편이죠. 하지만 사업한다는 사람이 대범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은 별로 좋은 거 같지 않습니다. 지금도 회사에서 단돈 100달러 나가는 클레임까지 제가 사인합니다. 직원들에게 경고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작은 사인을 무시하면 나중에 큰일 납니다. 남들이 보면 과감하게 투자하는 것 같지만 저 자신은 소심하다고 생각합니다.”

▷자녀들도 영원무역에 근무 중인데 어떤 말씀을 많이 해줍니까.

“두 딸이 임원으로 있는데, 어릴 때부터 공장과 아주 친숙한 분위기에서 자랐어요. 어린이날 학교는 쉬는데, 회사는 안 쉬니까 공장에 데려와 풀어 놓으면 재봉하는 직원들과 ‘언니 언니’ 하면서 친하게 어울려 지냈어요. 그러다 보니 공장에 대한 애정과 노동자에 대한 존중이 자연스레 생겨난 것 같습니다. 경영과 관련해 따로 조언 같은 것은 안 합니다. 그건 자기가 체득해야지 설교한다고 되는 게 아니죠.”

■ 성기학 회장은…
영원무역 40년 흑자 이끌어…카메라·오디오 수집 취미


1974년 영원무역을 설립해 나이키, 폴로 등 해외 유명 브랜드 옷을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공급하고 있다. 방글라데시 등 해외 4개국에서 6만명을 고용하고 있으며 40년째 흑자 경영을 이어오고 있다. 1992년에는 골드윈코리아(지금의 영원아웃도어)를 세우고 미국 아웃도어 브랜드 노스페이스를 들여와 국내 1위로 키워냈다. 등산 외에도 4000여대의 카메라를 비롯해 가야 토기, 조선시대 목기, 오디오 등 다방면의 수집 취미를 갖고 있다.

△1947년 서울 출생 △1965년 서울사범대부속고 졸업, 1970년 서울대 무역학과 졸업 △1971~1974년 서울통상 근무 △1974년 영원무역 설립 △1992년 골드윈코리아 설립 △2014년 8월~ 한국섬유산업연합회 13대 회장 △2008년 섬유의날 금탑산업훈장, 2009년 언스트앤영 최우수기업가상 수상

임현우 기자 tard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