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tv 토크콘서트] "엔지니어 곁에 둔 대통령이 산업의 기적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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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D-J'에 나온 오원철 前경제수석
'한강의 기적 설계자'와 대담
박정희 前대통령 5·16 정변 직후 기업인 100여명과 미래계획 토론
정책 결정할 땐 정치논리 아닌 과학·기술적 판단 우선시 돼야
'한강의 기적 설계자'와 대담
박정희 前대통령 5·16 정변 직후 기업인 100여명과 미래계획 토론
정책 결정할 땐 정치논리 아닌 과학·기술적 판단 우선시 돼야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고 며칠 뒤였어요. 평소처럼 공장에 나갔는데 ‘최고회의 출석할 것’이란 빨간딱지가 와 있더군요.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첫 인연이었죠.”(오원철 전 청와대 경제수석·86)
지난 25일 오후 6시, 서울 중림동 한국경제신문 1층 로비에선 정규재tv 주최로 ‘한강의 기적’을 이끌었던 원동력과 1960~1970년대 경제발전상에 대한 깊이 있는 토론이 펼쳐졌다.
○안보 위해 중화학공업 육성 나서
1부 행사는 오원철 전 수석과 정규재 한국경제신문 논설실장의 대담으로 진행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 옆에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부터 중화학공업 투자까지 설계해 박 전 대통령으로부터 ‘자네는 국보야’라는 칭찬까지 들었던 분”이라는 정 실장의 소개와 함께 정장을 갖춰 입은 80대의 오 전 수석이 무대 위에 올랐다.
한국 테크노크라트(기술관료)의 효시로 불리는 오 전 수석은 박 전 대통령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한 측근이었다. 경제성장기 당시 창원·울산·여수 등 산업공단을 비롯해 대덕연구단지, 포항제철 설립 등 굵직굵직한 프로젝트를 주도했고, 1973년 ‘오일쇼크’ 때는 한국 기업의 중동 진출을 기획했다.
그는 박 전 대통령과의 인연을 설명하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당시 오 전 수석은 국내 최초의 자동차 생산회사인 국제차량제작사 공장장이었다.
5·16 며칠 후 그는 국가재건기획위원회로부터 출석통지를 받았다. 서울 태평로에 있던 국회 제3별관으로 나가자 그곳엔 오 전 수석처럼 불려나온 기업인 학자 기술인 등 100여명이 모여 있었다. 재건위로부터 혁명정부의 미래 계획에 대해 제출할 것을 요구받은 그는 토론을 통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해 착실히 수행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놨다.
“본격적인 경제성장을 이끈 중화학공업 육성이 어떤 계기로 시작됐느냐”는 정 실장의 질문에 오 전 수석은 그동안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비화를 꺼냈다. 당시 정부가 중화학공업을 집중적으로 키울 것을 결심하는 데 1968년 벌어진 북한의 청와대 습격 사건이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었다. 오 전 수석은 “1·21 사태 이후 안보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예비군 제도를 도입했지만 이들을 무장시킬 무기가 크게 부족했다”며 “국방력 강화를 위해서라도 중화학공업을 육성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철수가 거론되던 주한미군을 한국에 계속 주둔시키기 위해서라도 미국에 우리가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공업국가임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며 “방위산업은 단순한 산업이 아닌 국가 안보와 직결된 문제”라고 말을 이었다.
○전문 지식 갖춘 엔지니어 조언 필요
오 전 수석은 과학과 기술에 근거한 판단보다 정치논리가 우선시되는 오늘날 정치권의 모습에 대해서는 우려를 나타냈다. 그는 “과거 어떤 시멘트 공장 두 곳의 입지 문제를 두고 정치권과 언론에서 큰 논란이 벌어진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대통령이 상공부 화학과장에 불과한 나를 불러 기술적 의견을 듣고 바로 판단을 내렸다”며 “전문지식을 갖춘 기술자가 적절한 조언을 해줘야 지도자 또한 고민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정규재tv는 정 실장이 2012년 2월 선보인 인터넷 팟캐스트 방송이다. 10월 현재 누적 조회 건수 1600만건, 하루평균 방문자 3만명을 기록하며 대표적인 인터넷 지식교양채널로 자리 잡았다.
홍선표 기자 rickey@hankyung.com
지난 25일 오후 6시, 서울 중림동 한국경제신문 1층 로비에선 정규재tv 주최로 ‘한강의 기적’을 이끌었던 원동력과 1960~1970년대 경제발전상에 대한 깊이 있는 토론이 펼쳐졌다.
○안보 위해 중화학공업 육성 나서
1부 행사는 오원철 전 수석과 정규재 한국경제신문 논설실장의 대담으로 진행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 옆에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부터 중화학공업 투자까지 설계해 박 전 대통령으로부터 ‘자네는 국보야’라는 칭찬까지 들었던 분”이라는 정 실장의 소개와 함께 정장을 갖춰 입은 80대의 오 전 수석이 무대 위에 올랐다.
한국 테크노크라트(기술관료)의 효시로 불리는 오 전 수석은 박 전 대통령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한 측근이었다. 경제성장기 당시 창원·울산·여수 등 산업공단을 비롯해 대덕연구단지, 포항제철 설립 등 굵직굵직한 프로젝트를 주도했고, 1973년 ‘오일쇼크’ 때는 한국 기업의 중동 진출을 기획했다.
그는 박 전 대통령과의 인연을 설명하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당시 오 전 수석은 국내 최초의 자동차 생산회사인 국제차량제작사 공장장이었다.
5·16 며칠 후 그는 국가재건기획위원회로부터 출석통지를 받았다. 서울 태평로에 있던 국회 제3별관으로 나가자 그곳엔 오 전 수석처럼 불려나온 기업인 학자 기술인 등 100여명이 모여 있었다. 재건위로부터 혁명정부의 미래 계획에 대해 제출할 것을 요구받은 그는 토론을 통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해 착실히 수행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놨다.
“본격적인 경제성장을 이끈 중화학공업 육성이 어떤 계기로 시작됐느냐”는 정 실장의 질문에 오 전 수석은 그동안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비화를 꺼냈다. 당시 정부가 중화학공업을 집중적으로 키울 것을 결심하는 데 1968년 벌어진 북한의 청와대 습격 사건이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었다. 오 전 수석은 “1·21 사태 이후 안보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예비군 제도를 도입했지만 이들을 무장시킬 무기가 크게 부족했다”며 “국방력 강화를 위해서라도 중화학공업을 육성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철수가 거론되던 주한미군을 한국에 계속 주둔시키기 위해서라도 미국에 우리가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공업국가임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며 “방위산업은 단순한 산업이 아닌 국가 안보와 직결된 문제”라고 말을 이었다.
○전문 지식 갖춘 엔지니어 조언 필요
오 전 수석은 과학과 기술에 근거한 판단보다 정치논리가 우선시되는 오늘날 정치권의 모습에 대해서는 우려를 나타냈다. 그는 “과거 어떤 시멘트 공장 두 곳의 입지 문제를 두고 정치권과 언론에서 큰 논란이 벌어진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대통령이 상공부 화학과장에 불과한 나를 불러 기술적 의견을 듣고 바로 판단을 내렸다”며 “전문지식을 갖춘 기술자가 적절한 조언을 해줘야 지도자 또한 고민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정규재tv는 정 실장이 2012년 2월 선보인 인터넷 팟캐스트 방송이다. 10월 현재 누적 조회 건수 1600만건, 하루평균 방문자 3만명을 기록하며 대표적인 인터넷 지식교양채널로 자리 잡았다.
홍선표 기자 ricke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