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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 신해철(사진)이 지난 27일 저산소 허혈성 뇌손상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 뒤로 닷새간 그의 음악을 찬찬히 들어봤다. 그의 이름을 처음 세상에 알린 ‘무한궤도’부터 ‘넥스트’, ‘모노크롬’, 솔로 활동 등을 통해 그가 남긴 발자취는 실로 방대했다.
◆지금은 촌스러운 20년 전의 ‘최신 음악’
유독 귀에 ‘꽂힌’ 노래는 1992년 발표한 넥스트 1집 ‘홈’의 수록곡 ‘도시인’이었다. 가사를 들으니 노래가 발표된 지 20여년이 지났지만 도시인의 일상은 예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다는 씁쓸함이 먼저 머리를 스친다. 그 다음엔 “확실히 옛날 노래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신해철은 록을 음악적 뿌리로 삼았지만 전자 음악을 본격적으로 사용한 초창기 세대이기도 하다. 솔로 음반 수록곡 ‘재즈 카페’에서 시도한 전자 음악이 이듬해 ‘도시인’으로 이어졌다. 이 곡 도입부에선 전자악기로 만든 다양한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당시 한국 음악계에선 혁신적인 시도였지만 지금은 ‘촌스럽다’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물론 이런 반응은 신해철의 음악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1990년대 초반 댄스음악을 지금 들어보면 ‘뿅뿅’거리는 사운드에 새삼 놀랄 것이다. 2000년대 음악을 들어도 비슷한 생각이 들 수 있다. 옛날 노래가 촌스럽게 들리는 것은 음악을 만드는 장비가 그동안 급격하게 발전했고 이로 인해 작곡 방식도 달라졌기 때문이다. 기타 한 대, 혹은 피아노 반주만으로 편곡한 노래라면 예나 지금이나 바뀐 것이 없기 때문에 위화감도 덜하다.
◆1963년 신시사이저 개발
전자 장비로 악기의 소리를 증폭시키는 방법은 20세기 초반부터 실용화됐지만 진정한 전자 음악의 시작은 1963년 미국의 전자공학자 로버트 모그가 현대적 신시사이저(synthesizer)를 내놓으면서부터다. 흔히 볼 수 있는 건반을 달아놓은 전자 악기다. 모그가 처음 만든 신시사이저는 기계음밖에 낼 수 없었지만 지금은 기계 내부에 다양한 소리를 저장해 이를 합성시켜 온갖 악기 소리를 재현할 수 있다.
전자 음악의 발전은 1983년 전자 악기의 연주 데이터를 전송하고 공유하기 위한 업계 표준 규격인 ‘미디(MIDI·Musical Instrument Digital Interface)’의 등장으로 붐을 맞았다. 때마침 PC가 보급되면서 신시사이저와 PC를 연결해 작·편곡이 가능해졌다. 전 세계적으로 ‘뿅뿅’ 소리가 울려 퍼졌던 것도 이맘때다.
지금은 기술의 발전으로 실제 악기를 방불케 하는 소리를 들려준다. 건반 장비 없이 컴퓨터만으로 연주가 가능한 ‘소프트웨어 신시사이저’도 생겨났다. 현재는 전자 음악을 녹음하고 편집할 수 있는 ‘디지털 오디오 워크스테이션(DAW)’이 일반화됐다.
전자 음악은 당시의 기술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만 만들 수 있다. 그 기술을 최대한 활용해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냈고 한계에 대한 갈증이 더 나은 기술을 불러왔다. 결국 모든 전자 음악은 앞세대의 음악에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반세기 동안 무수한 음악 실험”
신해철의 음악을 들으며 그의 디스코그래피를 다시 살펴봤다. 가장 눈에 띄는 앨범은 록밴드 ‘넥스트’의 ‘더 리턴 오브 넥스트 파트 1·2’와 ‘라젠카:어 스페이스 록 오페라’다. 헤비메탈부터 아트록까지 다양한 음악을 선보인, 한국 록음악 역사에 남을 명반들이다.
하지만 그의 음악적 여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동시대 음악가 누구보다도 새로운 사운드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도시인’과 ‘재즈 카페’를 통해 나타났던 전자 음악에 대한 관심은 1996년 윤상과 함께 만든 프로젝트 그룹 ‘노땐스(No Dance)’의 테크노·일렉트로닉 음악으로 이어졌다. 넥스트 해체 이후에도 ‘크롬스 테크노 웍스’ ‘모노크롬’ 등의 음반을 내놨고 프로젝트 밴드 ‘비트겐슈타인’을 통해 음악적 실험을 계속했다.
음악평론가 최규성 씨는 “신해철은 반세기 음악 여정 동안 무수한 음악 실험을 했다”며 “멈추지 않고 실험적 음악에 몰두하며 늘 새로운 음악적 변화를 추구한 것은 그의 도전정신 때문”이라고 평했다. 한국 음악인이라면 그에게 조금씩은 빚을 지지 않았을까.
이승우 기자 lees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