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프리 존스 "한국은 아주 자랑스러운 나의 나라, 나의 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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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 서울시민 된 제프리 존스 전 암참회장
서울 생활 35년째 미국 변호사
'다이내믹 코리아' 처음 만들어
등록금 전액 지원 등 재단 설립
서울 생활 35년째 미국 변호사
'다이내믹 코리아' 처음 만들어
등록금 전액 지원 등 재단 설립
‘파란 눈의 한국인’ 제프리 존스 미래의동반자재단 이사장·전 주한미국상공회의소(암참) 회장(사진)이 명예 서울시민이 됐다. 서울 내자동 김앤장 법률사무소에서 만난 그는 “한국은 아주 자랑스러운 나의 나라, 나의 조국, 내 것. 그렇게 느낀다”며 “한국 사람들의 저력은 어떤 민족보다 뛰어나다”고 말했다.
서울 생활 35년째에 접어드는 존스 이사장은 감자 생산지로 유명한 미국 아이다호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맥도날드 프렌치프라이를 이곳 감자로 만든다”고 귀띔했다. 어렸을 때 미 서부로 떠나 청소년기는 로스앤젤레스(LA)에서 보냈다. 유타주의 모르몬교 재단 사학인 브리검영대 재학 중 일본과 한국을 번갈아 방문하며 선교 활동을 했다. 그러다 1978년 일본에서 김앤장 창업자인 김영무 변호사와 만나면서 한국과의 인연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980년 한국에 들어와 변호사로 정착한 존스 이사장은 1980~90년대를 회상하며 “정말 정신없이 일했다”고 말했다. 주로 기업고객을 상대로 미국법 자문, 해외자금조달 지원 업무를 전담했다. “공정거래, 조세, 지식재산…. 요새 로펌 주요 업무는 주로 ‘보호’하고 ‘방어’하는 데 주력하거든요. 그런데 그때는 뭔가 나라, 국가를 내 손으로 건설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새로운 산업을 만들고 투자를 유치하고. 참 재미있었어요.” 그는 한국을 내 손으로 일궈냈다는 뿌듯함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최근 외국인, 기업 투자가 줄어드는 게 눈에 띄게 보인다며 우려했다. 저성장이 고착되는 신호가 감지된다고도 했다. 하지만 그는 “어떤 위기가 와도 한국인들은 상황에 바로 적응하고 어려움을 뒤집을 것”이라고 낙관했다.
존스 이사장은 외환위기 한복판에 있던 1998년 8월부터 2002년 12월까지 암참 회장을 지냈다. 지금은 누구나 아는 ‘다이내믹 코리아(dynamic korea)’ 슬로건을 최초로 고안해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제안한 사람이 바로 그다. ‘아시아 허브’란 표현도 마찬가지다. 외환위기가 잦아든 2001년 말 김 전 대통령이 경제전문가 10여명을 모아 향후 국가전략을 자문할 때 이 두 개 슬로건을 제안했다고 했다. 존스 이사장은 “언론에 처음 말하는 것이다. 다이내믹 코리아는 내가 원조다”라며 웃었다.
2000년 미래의동반자재단을 세운 것도 IMF 위기와 관련이 깊다. “가정이 무너지고 자살도 이어지고. 너무 아프고 안타까운 일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재단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 함께 일하던 태미 오버비(현 미국상공회의소 부회장)에게 “일 년에 100만달러씩 모아 학생들 대학 등록금 4년치를 지원하는 재단을 만들어 보자”고 제안했다. ‘미쳤느냐’는 답이 돌아왔지만 밀어붙였다. 그는 “기업들 꼬드겨 했지요. 안 되는 게 어딨어요”라며 웃었다. 지금까지 재단 수혜를 받은 학생은 2000여명에 이른다.
암참 회장을 마친 후에는 손학규 전 경기지사와의 인연으로 경기영어문화원 원장을 지냈다. 파주, 양평, 안산 세 곳에 영어마을을 세웠다. “영어를 ‘영어로’ 가르치면 안 돼요. 드라마 음악 사이언스(과학) 역사 수학 등에 녹여서 가르치면 아이들이 정말 빨리 배웁니다. 아주 자연스럽고 재미있게 말입니다.” 경기영어마을이 적자누적으로 고전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잘 몰라요. 제가 맡을 땐 참 좋았어요. 우리나라는 장(長)이 바뀌면 다 바뀌니까. 다이내믹 코리아잖아요”라고 ‘쿨’하게 답했다.
존스 이사장은 1999년 한국 여성과 결혼해 슬하에 두 아들을 뒀다. 주말에는 전국 지방자치단체가 만들어 놓은 체육시설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며 아들들에게 테니스 등 운동을 시키고 있다. 그는 “내 일과 가족, 두 가지만 생각한다. 욕심을 버리고 살 때 가장 행복하다”고 말했다.
이해성 기자 ihs@hankyung.com
서울 생활 35년째에 접어드는 존스 이사장은 감자 생산지로 유명한 미국 아이다호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맥도날드 프렌치프라이를 이곳 감자로 만든다”고 귀띔했다. 어렸을 때 미 서부로 떠나 청소년기는 로스앤젤레스(LA)에서 보냈다. 유타주의 모르몬교 재단 사학인 브리검영대 재학 중 일본과 한국을 번갈아 방문하며 선교 활동을 했다. 그러다 1978년 일본에서 김앤장 창업자인 김영무 변호사와 만나면서 한국과의 인연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980년 한국에 들어와 변호사로 정착한 존스 이사장은 1980~90년대를 회상하며 “정말 정신없이 일했다”고 말했다. 주로 기업고객을 상대로 미국법 자문, 해외자금조달 지원 업무를 전담했다. “공정거래, 조세, 지식재산…. 요새 로펌 주요 업무는 주로 ‘보호’하고 ‘방어’하는 데 주력하거든요. 그런데 그때는 뭔가 나라, 국가를 내 손으로 건설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새로운 산업을 만들고 투자를 유치하고. 참 재미있었어요.” 그는 한국을 내 손으로 일궈냈다는 뿌듯함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최근 외국인, 기업 투자가 줄어드는 게 눈에 띄게 보인다며 우려했다. 저성장이 고착되는 신호가 감지된다고도 했다. 하지만 그는 “어떤 위기가 와도 한국인들은 상황에 바로 적응하고 어려움을 뒤집을 것”이라고 낙관했다.
존스 이사장은 외환위기 한복판에 있던 1998년 8월부터 2002년 12월까지 암참 회장을 지냈다. 지금은 누구나 아는 ‘다이내믹 코리아(dynamic korea)’ 슬로건을 최초로 고안해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제안한 사람이 바로 그다. ‘아시아 허브’란 표현도 마찬가지다. 외환위기가 잦아든 2001년 말 김 전 대통령이 경제전문가 10여명을 모아 향후 국가전략을 자문할 때 이 두 개 슬로건을 제안했다고 했다. 존스 이사장은 “언론에 처음 말하는 것이다. 다이내믹 코리아는 내가 원조다”라며 웃었다.
2000년 미래의동반자재단을 세운 것도 IMF 위기와 관련이 깊다. “가정이 무너지고 자살도 이어지고. 너무 아프고 안타까운 일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재단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 함께 일하던 태미 오버비(현 미국상공회의소 부회장)에게 “일 년에 100만달러씩 모아 학생들 대학 등록금 4년치를 지원하는 재단을 만들어 보자”고 제안했다. ‘미쳤느냐’는 답이 돌아왔지만 밀어붙였다. 그는 “기업들 꼬드겨 했지요. 안 되는 게 어딨어요”라며 웃었다. 지금까지 재단 수혜를 받은 학생은 2000여명에 이른다.
암참 회장을 마친 후에는 손학규 전 경기지사와의 인연으로 경기영어문화원 원장을 지냈다. 파주, 양평, 안산 세 곳에 영어마을을 세웠다. “영어를 ‘영어로’ 가르치면 안 돼요. 드라마 음악 사이언스(과학) 역사 수학 등에 녹여서 가르치면 아이들이 정말 빨리 배웁니다. 아주 자연스럽고 재미있게 말입니다.” 경기영어마을이 적자누적으로 고전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잘 몰라요. 제가 맡을 땐 참 좋았어요. 우리나라는 장(長)이 바뀌면 다 바뀌니까. 다이내믹 코리아잖아요”라고 ‘쿨’하게 답했다.
존스 이사장은 1999년 한국 여성과 결혼해 슬하에 두 아들을 뒀다. 주말에는 전국 지방자치단체가 만들어 놓은 체육시설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며 아들들에게 테니스 등 운동을 시키고 있다. 그는 “내 일과 가족, 두 가지만 생각한다. 욕심을 버리고 살 때 가장 행복하다”고 말했다.
이해성 기자 i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