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터져버린 거품이 몰고온 불황…세계는 지금 '빚 갚는 중'
한국은행은 지난 9월30일 국회에 제출한 ‘통화신용정책보고서’에서 한국 경제의 완만한 회복세를 예측하며 ‘대차대조표 불황(balance sheet recession)’을 언급했다. 보고서는 “완만한 성장세의 기저에는 저출산·고령화에 따른 인구구조 변화, 투자의 한계효율 저하 등 국내 경제의 구조적 취약 요인이 상당 부분 반영돼 있다”며 “금융기관이나 기업들의 이른바 소위 ‘대차대조표 불황’을 떨쳐내는 구조조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준일 한은 부총재보는 보고서 설명회에서 “금융 위기 과정에서 은행들이 손실을 입어 자본 기반이 취약해졌고, 기업도 투자 유인이 줄었다”며 “이런 상황에 따라 금리가 떨어져도 대출 여력이나 수요가 늘지 않는 대차대조표 불황이 이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책마을] 터져버린 거품이 몰고온 불황…세계는 지금 '빚 갚는 중'
대차대조표 불황은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리는 1990년대 일본의 장기 불황을 설명하는 경제학 이론에서 나온 개념이다. 리처드 쿠 일본 노무라종합연구소 수석 연구원(60·사진)이 ‘대차대조표 불황’이란 용어를 만들고 이론을 정립했다. 미국에선 벤 버냉키 전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이 2007년 금융위기 이후 몇 차례 언급하면서 주목받았다.

쿠 연구원은 신간 《밸런스시트 불황으로 본 세계 경제》에서 먼저 지난 20여년간의 일본 경제를 분석하며 ‘대차대조표 불황 경제학’의 기본 개념과 이론을 설명한다. 이를 바탕으로 미국의 ‘양적 완화의 함정’, 그리스를 제외한 유럽연합(EU) 가맹국의 ‘대차대조표 불황’, 중국이 ‘중진국 함정’에 빠질 위험, ‘아베노믹스’의 장단점 등 세계 경제의 여러 현상과 문제를 진단하고 구체적인 해법을 제시한다.

20여년 전 일본과 2007년 금융위기가 닥친 미국, EU의 공통점은 빚에 기초해 형성된 거대한 자산 거품이 붕괴했다는 점이다. 자산가격 급락으로 대차대조표의 부채가 불어난 가계와 기업 등 민간 부문은 이익 최대화보다 채무 최소화를 우선시한다. 금리가 제로나 제로 가까운 수준으로 떨어져도 민간 부문은 돈을 빌리기보다 갚는 데 집중해 소비와 투자가 감소한다. 이런 총수요 감소로 생기는 대규모 불황이 대차대조표 불황이다. 좀 더 경제학적인 용어로 설명하면 민간 부문이 초저금리에도 채무변제를 포함한 저축에 몰두함으로써 민간에 돈을 빌리려는 주체가 없어 발생한 ‘미차저축(가계가 저축했지만 기업이 빌리지 않아 은행에 남아있는 돈)’이 경제의 소득순환에서 누락돼 발생한 불황이다.

저자는 이런 불황에는 정부가 충분한 규모의 재정을 신속하고 지속적으로 지출하는 것이 최종 누적 적자를 최소화하는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재정 지출로 민간 소득이 유지되고 민간은 그 유지된 소득을 통해 채무 변제를 추진해 대차대조표가 조기에 회복된다는 논리다.

재정 조달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 소득순환에서 누락된 미차저축을 재원으로 삼기 때문이다. 민간 수요가 없어 오갈 데 없는 미차저축 자금의 대부분이 국채 매입에 쓰임에 따라 국채 금리는 하락한다. 재정지출의 재원 확보와 조달 비용에 큰 부담이 없는 셈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대차대조표 불황의 자동 복원 메커니즘’이다.

저자는 불황 극복을 위한 일본의 대규모 재정 지출을 정당화하는 이론적 토대를 제시하고 이를 적극 지지해 왔다. 그는 “일본이 ‘버블 붕괴’로 국내총생산(GDP)의 3년치에 해당하는 국부를 상실했는데도 버블 절정기를 상회하는 GDP를 유지한 것은 대규모 경기부양책(재정지출)으로 ‘디플레 갭(deflation gap)’이 표면화되는 것을 방지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EU는 자동 복원 메커니즘이 작동하지 않는다. 스페인 아일랜드 등 EU 가맹국에선 대차대조표 불황이 발생했음에도 국채금리가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상승했다. EU는 단일 통화지만 17개나 되는 국채시장이 존재하고 이들 시장 간 자본 이동이 자유로워 미차저축이 자국채보다 안전한 국채로 쏠렸기 때문이다. 저자가 “EU 위기는 대차대조표 불황론의 응용 문제”라고 부르는 이유다. 해법도 “메커니즘 기능을 회복해 재정 지출을 확대하는 것”이다.

저자는 “유로 통화의 안정을 위해선 ‘국채는 자국민만 구입 가능하다’는 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며 “더욱 현실적인 대안으로 자국채와 외국채에 상이한 ‘리스크 가중치’를 설정하는 방법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가맹국의 재정 지출을 GDP의 3% 이내로 제한하는 마스트리히트 조약의 조속한 수정도 필요하다”며 “EU 정책 담당자들이 대차대조표 불황의 메커니즘을 먼저 제대로 이해하고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