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많은 실버 세대’를 잡기 위한 경쟁에 패션 식품 엔터테인먼트업체들이 앞다퉈 뛰어들고 있다. 그동안 노년층을 겨냥한 소비재 상품은 염색약, 성인용 기저귀, 치아관리 용품, 건강식품 정도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노년층의 지갑을 열기 위해 다양한 상품과 마케팅 기법이 등장하고 있다. 영국 리서치업체 유로모니터에 따르면 전 세계 60세 이상 베이비붐 세대의 구매력은 2020년 15조달러(약 1경6400조원), 60세 이상 인구 수는 2050년 약 20억명에 달할 전망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베이비붐 세대는 나이가 드는 것을 ‘운명’이 아닌 ‘라이프 스타일’로 받아들이고 있다”며 “업계 전반이 10~20대 소비자가 아닌 실버 세대에 집중하고 있다”고 9일 보도했다.

○패션업계, 60대 모델 기용 붐

재키 오쇼네시
재키 오쇼네시
미국과 영국 패션 업계에선 올해 ‘60대 모델’이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미국 정통 의류브랜드 아메리칸어패럴은 최근 프리미엄 속옷 모델로 재키 오쇼네시(62)를 파격 기용했다. 명품 브랜드 마크 제이콥스와 코스메틱브랜드 나스는 각각 제시카 랭(65)과 샬론 램플링(68)을 화장품 모델로 썼다. 미국 캐주얼 의류 브랜드 J크루는 로렌 허튼(70)과 최근 광고 촬영을 마쳤다.

명품업계는 이보다 먼저였다. 2012년 랑방과 돌체&가바나는 각각 재키 타야 머독(당시 82세)과 다프네 셀프(83세)를, 불가리는 60세의 이사벨라 로셀리니를 모델로 기용했다.

60代 란제리 모델…치매 예방 우유…구매력 15조달러 '실버머니' 잡아라
막스앤스펜서(M&S) 임원을 지낸 스테픈 본드는 “요즘의 노년층은 더 이상 전통적인 ‘어르신’ 같은 옷을 입지 않는다”며 “40대와 비슷하게, 혹은 최신 유행하는 옷을 입으려 한다”고 강조했다.

M&S는 근육량이 줄고 팔다리가 가늘어지는 노년층 체형 변화에 맞춘 옷을 디자인하기 위해 실버 디자인 연구소를 신설했다. 올해 출시한 제품군의 90%는 노년층 취향을 고려해 소매가 달린 것을 내놨다. FT는 “65세 이상 영국인이 지난해 의류와 신발 구매에 쓴 돈은 총 69억파운드로 전체 시장의 15%를 차지한다”며 “소비액은 5년 내 87억파운드까지 증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에스티로더, 랑콤, 시세이도 등 다국적 화장품 회사들은 내년에 실버 전용 제품군을 잇따라 출시할 예정이다. 장 폴 아곤 로레알 최고경영자(CEO)는 “고가 화장품에 기꺼이 돈 쓸 준비가 된 노년층이 몰려오면서 업계에 ‘실버 쓰나미’라는 표현까지 등장했다”고 말했다.

○식품·문화계도 ‘실버 구애작전’

식품업계도 ‘실버 머니’를 잡기 위해 변신을 꾀하고 있다. 다국적 식품기업 네슬레는 1930년대부터 만들어온 초콜릿 제품 ‘블랙매직’의 포장 디자인을 전면 개편했다. 무게를 줄이고, 열기 쉽도록 포장을 단순화했다. 내용물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글씨와 그림 크기는 키웠다. 프랑스 생수업체 에비앙도 물병의 크기를 작게 하고, 좀 더 가볍게 만들었다. 유제품 회사 다논은 서로 비슷해 보이는 요구르트 포장을 한눈에 내용물 차이를 알 수 있도록 개선했다.

포장뿐 아니다. 일본 식품회사 아사히그룹은 작은 크기의 건강 수프를 내놨고, 다논은 알츠하이머 초기 환자를 위한 유제품을 중국에서 출시했다. 피에르 앙드레 테리즈 다논 재무담당 이사는 “노년층의 건강을 위한 성분 연구를 꾸준히 진행 중”이라며 “유아식에 쓰이던 식품 연구 기술을 실버 전용 식품에 적용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본 조비
본 조비
문화와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도 변화가 감지된다. 지난해 전 세계 대형 콘서트 시장은 1970~1980년대 전성기를 누렸던 팝스타들이 장악했다. 가장 많은 수익을 낸 월드투어 콘서트 상위 10개 중에는 본 조비(2억516만달러·1위), 브루스 스프링스턴(1억4761만달러·4위), 롤링스톤스(1억2618만달러·6위), 디페시모드(9997만달러·9위), 고(故) 마이클 잭슨의 공연을 서커스로 재해석한 임모탈(1억5729만달러·2위) 등이 대거 포함됐다.

세계적인 록페스티벌의 관객 연령도 높아졌다. 영국 글래스턴베리 축제 관객의 평균 연령은 1970년대 34세에서 현재 40세로 높아졌다. 영국의 유명 공연 기획자인 하비 골드스미스는 “레드 제플린 등 왕년의 스타들이 다시 뭉치는 것 역시 이런 추세를 반영한다”고 말했다. 영국에는 최근 실버 관객을 위해 VIP 객석을 늘리고 추가 요금을 내면 럭셔리 요트에서 관람할 수 있는 제품도 등장했다.

김보라/김순신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