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스페인 최대 은행인 방코 산탄데르는 에밀리오 보틴 회장이 심장마비로 갑자기 타계하자 회장직 승계자로 보틴 회장의 장녀 아나 파트리샤 보틴을 지명했다. 미국 2위 뮤추얼펀드 회사인 피델리티인베스트먼트는 지난달 차기 최고경영자(CEO)에 창업주의 손녀이자 현 CEO의 딸인 에비게일 존슨을 임명, 3대 경영 체제를 구축했다.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11월 최신호에서 위의 두 사례를 들며 경영권 유지가 어려울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고 창업 가문이 회사를 지배하는 가족경영기업이 늘고 있다고 보도했다.

컨설팅회사 맥킨지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포천 500대 기업’ 중 19%가 가족경영기업이다. 2005년 15%에서 오히려 비중이 늘어났다. 유럽은 증시에 상장된 대기업의 40%에서 창업주 가문이 경영권을 행사한다. 맥킨지는 2025년엔 세계적으로 매출 10억달러 이상의 대기업이 1만5000개에 달하고, 이 중 37%를 개발도상국의 가족경영기업이 차지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는 2010년 8000개(15%)에서 배 이상 증가한 숫자다.

이코노미스트는 가족경영기업이 유지되는 근본적인 이유로 창업주 가문에 의한 가족경영의 장점을 꼽았다. 경영능력을 갖춘 창업자나 후손이 단기 실적에 쫓기지 않고 장기적인 시각에서 뚝심 있게 기업을 끌고갈 수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차입을 꺼리는 오너들이 부채비율을 낮게 유지해 위기 시 더욱 안정적으로 회사를 운영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맥킨지 조사에 따르면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가족경영기업의 매출 증가율은 연평균 7%로 일반기업의 6.2%를 넘어섰다.

홍보대행사 에델만이 최근 일반인을 상대로 기업 이미지를 조사한 결과 가족경영기업 신뢰도(73%)가 일반기업(64%)보다 높게 나타나는 등 책임 경영에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코노미스트는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벌어지는 가족 간 분쟁이 기업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점은 가족경영의 단점이라고 지적했다. PWC 자료에 따르면 세계 40개국의 2400개 오너기업 중 경영권 승계계획을 가족 간에 합의된 문서로 갖고 있는 곳은 16%에 불과하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이 밖에 적은 지분으로 지배권 유지가 가능한 각종 경영권 보호장치가 허용된 점도 가족경영기업이 대를 이어 유지할 수 있는 이유로 꼽았다. 의결권 비중이 높은 황금주나 순환출자를 통한 기업지배가 가능해지면서 페이스북이나 구글도 창업주 후손이 경영권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뉴욕=이심기 특파원 s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