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과 종이, 비움과 채움…정직한 대결
투명한 빛이 들어오는 실내 공간에 8평 남짓한 수조가 있다. 그 안에는 검디검은 먹물이 그득하다. 수조 한쪽에는 사방 1.3m 크기로 만든 한지 기둥이 손바닥만 한 돌멩이 위에 사뿐 앉아 있다. 묵(墨)과 종이, 흑과 백, 어둠과 빛, 채움과 비움이 닫힌 공간 안에서 소리 없는 대결을 펼치고 있다. 정중동(靜中動·조용한 가운데 이는 움직임)이란 이를 말하는 것일까.

한국화가 김호득 영남대 미술학부 교수(64·사진)의 개인전 ‘그냥, 문득’이 다음달 5일까지 서울 평창동 김종영미술관에서 열린다. 김 교수는 지난 40년간 수묵화의 현재화에 전념해 온 작가다. 수묵화의 근본이 되는 지필묵은 지키면서도 한국화와 현대미술과의 접점을 만들어 왔다. 이번 전시에는 신작 14점을 포함해 회화 설치 등 24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최근 전시장에서 만난 김 교수는 “동양화의 화두를 현재의 시각을 담아 간략하게 전달하고 싶었다”며 “나이 육십이 넘었으니 전시 제목에 ‘그냥’이란 단어를 써도 남들이 무시하진 않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웃었다.

그는 젊었을 때 2박3일간 작정하고 술을 먹을 만큼 지독한 애주가였다. 1996년 간경화와 폐렴으로 쓰러진 뒤 술과 담배를 일절 끊었다. 이듬해 다시 붓을 잡은 그는 술 대신 신문, 커피, 음악에 빠졌다. “제가 중독이 잘됩니다. 32면 신문을 한 글자도 빼지 않고 읽으면 4시간이 걸려요. 신문을 읽는 과정이 생각할 여지를 줬습니다. 그렇게 뜸을 들이다 생각이 그물망에 잡힐 때가 있어요. 그러면 그것을 작품으로 표현해냈죠.” (02)3217-6484

김인선 기자 indd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