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압록강부터 베이징까지…조선 사신들의 길을 밟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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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행사의 길을 가다
서인범 지음 / 한길사 / 576쪽 / 2만2000원
서인범 지음 / 한길사 / 576쪽 / 2만2000원
‘우거진 숲은 장막을 둘렀고, 군데군데 호랑이 잡는 그물을 쳐놓았다.……이윽고 부사와 서장관이 차례로 이르렀는데 해가 이미 황혼이다. 30여 군데에 횃불을 놓되, 모두 아름드리 큰 나무를 톱으로 찍어다 먼동이 틀 때까지 환하게 밝힌다. 군뢰가 나팔을 한 마디 불면 300여명이 일제히 소리를 맞추어 고함치는데 이는 호랑이를 경비함이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나오는 대목이다. 조선 정조 4년(1780년)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을 축하하는 연행 사절단으로 길을 나선 연암은 압록강부터 랴오양(遼陽)에 이르기까지 노숙하던 풍경을 이렇게 전했다. 여름엔 무더위와 등에, 모기 같은 벌레들이 습격했고 겨울엔 추위를 견뎌야 했다.
연행사란 고려와 조선을 통틀어 약 700년 동안 중국의 원(元), 명(明), 청(淸) 수도인 연경(燕京)에 정기적으로 파견한 사신이다. 13~19세기 연행사가 중국에 다녀온 횟수는 1797회에 이른다. 정사, 부사, 서장관, 군관, 역관 등 30여명의 사신단을 비롯해 말몰이꾼 등 부대인원을 합하면 연행사 규모는 300~600명에 달했다. 이 연행사가 남긴 사행 기록이 연행록인데 현재까지 발굴·수집된 연행록은 600여종에 이른다.
《연행사의 길을 가다》는 10년 이상 연행록을 연구해 온 서인범 동국대 사학과 교수가 조선 사신들이 걸었던 길을 직접 밟아가며 조선시대 대(對)중국 외교의 본질과 지혜를 읽어낸 역사답사기다. 저자는 지난해 7월 압록강에서부터 산하이관(山海關)을 거쳐 베이징과 중국 황제의 여름 별궁이 있는 청더(承德)에 이르기까지 조선 사신들이 걸었던 2000㎞의 사행길을 도보와 챠량, 기차, 배 등으로 답사했다.
저자는 천 길 낭떠러지 위로 난 고갯길과 눈을 뜰 수조차 없었던 모랫길, 통과하기가 쉽지 않았던 장성, 산적 떼와 호랑이, 풍토병과 열악한 숙소, 중국 관리들의 뇌물 요구와 공식 외교업무를 방해한 장사치 등 구구절절한 연행사의 이야기를 총 네 부에 걸쳐 들려준다. 사행단 가운데 기록을 담당했던 서장관(書狀官)을 ‘필(筆)’이라는 이름으로 등장시켜 저자와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옛이야기를 풀어낸 게 재미있다. 연행록 전문가인 저자가 질문하고 서장관 ‘필’이 설명하는 형식이다.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이곳(랴오닝성 안산역)을 통과할 때도 인정물품이 필요했지요?” “사람이 관계되는 곳 모두 그렇지 않았겠나.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청렴한 관료나 군사를 찾기가 쉽지 않았어.”
‘인정물품’은 요즘 말로 뇌물이다. 사행단은 지나가는 역참마다 뇌물을 바쳐야 했고, 아예 ‘인정물품’을 처음부터 사행단 예산에 잡아야 했다. 중종 36년 중국 황태자의 탄생을 축하하는 천추사가 안산역을 지날 땐 군관이 성문을 닫아놓고 인정물품을 요구했다. 돌아올 땐 장교의 행동을 본받은 부하들조차 인정물품을 주지 않는다며 사행단을 마구 폭행해 결국 뇌물을 준 뒤에야 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고 서장관 ‘필’은 들려준다.
연행길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풍토병과 도적 떼, 사고 등으로 죽는 이도 많았다. 천신만고 끝에 연경에 도착한 사신들은 황제를 알현하고 조선의 국익을 지키기 위해 외교적인 활약을 펼쳤다. 외교 업무에서도 중국 관료들의 ‘인정물품’ 요구가 심했고, 예부의 최고 관료였던 상서(尙書)마저 뇌물로 다량의 인삼을 요구할 정도였다. 저자는 중국 관료들의 심한 텃세와 도를 넘은 뇌물 요구에도 조선 사신들이 일을 성공적으로 마친 이유로 ‘관시(關系)’를 들면서 “결국 외교도 사람 간의 만남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나오는 대목이다. 조선 정조 4년(1780년)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을 축하하는 연행 사절단으로 길을 나선 연암은 압록강부터 랴오양(遼陽)에 이르기까지 노숙하던 풍경을 이렇게 전했다. 여름엔 무더위와 등에, 모기 같은 벌레들이 습격했고 겨울엔 추위를 견뎌야 했다.
연행사란 고려와 조선을 통틀어 약 700년 동안 중국의 원(元), 명(明), 청(淸) 수도인 연경(燕京)에 정기적으로 파견한 사신이다. 13~19세기 연행사가 중국에 다녀온 횟수는 1797회에 이른다. 정사, 부사, 서장관, 군관, 역관 등 30여명의 사신단을 비롯해 말몰이꾼 등 부대인원을 합하면 연행사 규모는 300~600명에 달했다. 이 연행사가 남긴 사행 기록이 연행록인데 현재까지 발굴·수집된 연행록은 600여종에 이른다.
《연행사의 길을 가다》는 10년 이상 연행록을 연구해 온 서인범 동국대 사학과 교수가 조선 사신들이 걸었던 길을 직접 밟아가며 조선시대 대(對)중국 외교의 본질과 지혜를 읽어낸 역사답사기다. 저자는 지난해 7월 압록강에서부터 산하이관(山海關)을 거쳐 베이징과 중국 황제의 여름 별궁이 있는 청더(承德)에 이르기까지 조선 사신들이 걸었던 2000㎞의 사행길을 도보와 챠량, 기차, 배 등으로 답사했다.
저자는 천 길 낭떠러지 위로 난 고갯길과 눈을 뜰 수조차 없었던 모랫길, 통과하기가 쉽지 않았던 장성, 산적 떼와 호랑이, 풍토병과 열악한 숙소, 중국 관리들의 뇌물 요구와 공식 외교업무를 방해한 장사치 등 구구절절한 연행사의 이야기를 총 네 부에 걸쳐 들려준다. 사행단 가운데 기록을 담당했던 서장관(書狀官)을 ‘필(筆)’이라는 이름으로 등장시켜 저자와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옛이야기를 풀어낸 게 재미있다. 연행록 전문가인 저자가 질문하고 서장관 ‘필’이 설명하는 형식이다.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이곳(랴오닝성 안산역)을 통과할 때도 인정물품이 필요했지요?” “사람이 관계되는 곳 모두 그렇지 않았겠나.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청렴한 관료나 군사를 찾기가 쉽지 않았어.”
‘인정물품’은 요즘 말로 뇌물이다. 사행단은 지나가는 역참마다 뇌물을 바쳐야 했고, 아예 ‘인정물품’을 처음부터 사행단 예산에 잡아야 했다. 중종 36년 중국 황태자의 탄생을 축하하는 천추사가 안산역을 지날 땐 군관이 성문을 닫아놓고 인정물품을 요구했다. 돌아올 땐 장교의 행동을 본받은 부하들조차 인정물품을 주지 않는다며 사행단을 마구 폭행해 결국 뇌물을 준 뒤에야 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고 서장관 ‘필’은 들려준다.
연행길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풍토병과 도적 떼, 사고 등으로 죽는 이도 많았다. 천신만고 끝에 연경에 도착한 사신들은 황제를 알현하고 조선의 국익을 지키기 위해 외교적인 활약을 펼쳤다. 외교 업무에서도 중국 관료들의 ‘인정물품’ 요구가 심했고, 예부의 최고 관료였던 상서(尙書)마저 뇌물로 다량의 인삼을 요구할 정도였다. 저자는 중국 관료들의 심한 텃세와 도를 넘은 뇌물 요구에도 조선 사신들이 일을 성공적으로 마친 이유로 ‘관시(關系)’를 들면서 “결국 외교도 사람 간의 만남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