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보니 ‘깡순이·깡돌이’
김인희 “엄마가 일수 얻어서 가르쳐…투잡 뛰면서도 포기 안해”
제임스 전 “부모님이 발레 반대…웨이터로 일하며 생활비까지 벌어”

노숙인에게 발레 가르치는 이유
사회가 건강하고 행복해져야 예술이 인정받을 수 있어
창작과 사회공헌 두 토끼 잡고 후배들의 본보기 되겠다


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서울발레시어터(SBT)는 국내 발레계의 외인구단이다. 태생부터가 다르다. 프로발레단 중 단원에게 고정급과 4대 보험을 제공하는 단체는 딱 네 곳이 있다. 국립발레단, 유니버설발레단, 광주시립무용단 그리고 SBT. 앞의 세 단체는 각각 정부, 종교단체, 시 주도로 만들어졌다. 그곳에서 매년 예산을 지원받아 안정적으로 운영된다. 연습실과 사무실이 들어선 보금자리도 있다.

반면 SBT는 1995년 김인희 단장(51)과 그의 남편인 제임스 전 예술감독(한국명 전상헌·55)이 순수 개인의 힘으로 창단했다.

무용 스타일도 도드라진다. 앞선 세 단체가 ‘백조의 호수’ ‘지젤’ 같은 서양의 유명 클래식 발레를 가져와 공연하는 반면 SBT는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퀸’ 노래에 맞춰 춤추는 등 모던발레를 기반으로 한 창작발레를 무대에 올려왔다. 지난 19년간 ‘현존1,2,3’ ‘사계’ ‘이너무브즈’ 등 80여개의 창작발레를 만들었다.

무용 불모지와 다름없던 국내 공연 환경에서 19년간 개인의 힘으로 단체를 꾸려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김 단장과 전 예술감독의 단골집인 서울 삼전동의 ‘명품 삼겹살’에서 그 울퉁불퉁한 길을 되돌아가 봤다.

김인희 단장과 제임스 전의 인연

두 사람을 만나기로 약속한 오후 8시께, 식당 안에 들어서자 십여개의 솥뚜껑에선 두툼한 오겹살이 빗소리를 내며 익고 있었다. 편안한 분위기의 동네 삼겹살집이다. ‘소탈한 성격의 김 단장다운 선택이다’ 싶었다. 그는 “우리 부부가 이 동네에 사는 데 오가는 길에 우연히 들른 게 시작이 돼 11년 단골이 됐다”며 “단원 회식은 물론이고 외국에서 중요한 손님이 오면 이곳에 꼭 모시고 온다”고 설명했다. 전 감독은 “스위스 바젤발레단 단장 리처드 워록, 캐나다 로열 위니펙 발레단의 장 웨이창 부단장 등 세계 각국의 무용계 인사가 이곳에 다녀갔다”고 귀띔했다.

김 단장이 노르스름하게 익은 오겹살 한 점을 접시에 덜어주며 한 번 맛을 보라고 했다. 전 감독은 파무침을 꼭 함께 먹어보라고 했다. 구운 김치 조각 위에 고기를 깔고 파무침을 얹어 입에 넣었다. 어떤 형용사로 이 맛을 담아낼 수 있을까. 솥뚜껑에 자꾸만 젓가락이 갔다.

부부는 1987년 처음 인연을 맺었다. 김 단장은 당시 모나코 왕립발레학교를 거쳐 유니버설발레단 수석무용수로 주목받던 때였다. 전 감독은 미국 줄리아드대를 졸업한 뒤 플로리다발레단에서 활동하던 시기였다. 전 감독이 유니버설발레단에 객원무용수로 잠시 왔다가 김 단장에게 첫눈에 반했다.

“프리마 발레리나인데 성격이 너무나 소탈했어요. 뭐든지 맛있게 먹는 모습이 보기 좋았죠. 미국에 돌아가 한 달에 100만원씩 국제전화비를 써가며 구애를 했어요.”(전 감독)

이때 김 단장이 말을 받았다. “안 넘어가고 싶었는데…. 결혼을 결심하기 전에 딱 두 개를 물어봤어요. ‘결혼해도 발레를 할 수 있어?’ ‘먹고 싶은 거 다 먹여줄 수 있어?’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형제가 몇인지도 몰랐어요.” 1989년 일이다.

한 번 아파본 사람은 면역이 생긴다

김 단장은 발레 조기유학 1세대다. 1980년 모나코 왕립발레학교로 유학을 떠나 공부했고 귀국 후 1984년 창단한 유니버설발레단 창단무용수로 뛰었다. 김 단장이 소맥(맥주에 소주를 섞은 술)을 한 잔 털어놓고 이야기를 꺼냈다.

“선화예중·고를 나오고 모나코에 갔다 왔다고 하면 집이 준재벌쯤 되는 줄 알아요. 그런데 전 엄마가 노점상 일수를 얻어서 발레를 가르쳤어요. 토슈즈 한 켤레 사려면 엄마가 서울 화양리 대폿집에서 빈대떡을 몇 장 더 팔아야 하는지 너무나 잘 아니까…. 발레가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할 수 없었죠. 유학시절에는 집에서 한 달에 300달러씩 보내줬어요. 알고 보니 엄마가 어렵게 마련한 전세금을 깨서 보낸 것이었어요. 귀국해 보니 여섯 식구가 창문도 화장실도 없는 무허가 건물에서 살고 있더군요.”

유학만 마치면 장원급제한 어사처럼 돈을 펑펑 벌 줄 알았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유니버설발레단에서 무용수로 활동하면서 투잡을 뛰었어요.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거든요. 유니버설발레단 건너편에 발레학원을 냈어요. 오후 6시 퇴근하자마자 밥도 안 먹고 혼자 아이들을 가르쳐 오후 11시에 퇴근했죠.”

전 감독은 재미동포 1.5세다. 캘리포니아에 살던 그는 부모의 뜻대로 회계학을 공부하던 중 우연히 발레를 접한 뒤 2000달러만 들고 뉴욕으로 떠났다. “부모님이 발레하는 것을 반대해서 한 푼도 도움을 주지 않았죠. 웨이터로 일하며 학비는 물론 생활비까지 벌어가며 생활했어요. 졸업식 날 어머니가 절 보고 통곡을 하더군요.”

해외에 수출할 창작발레 만들자

전 감독이 후식으로 누룽지탕과 볶음밥을 주문했다. 이곳 누룽지는 직접 솥에 눌러 만든단다. 잠시 뒤 주문한 후식이 나왔다. 누룽지탕은 외할머니가 해주던 것처럼 구수하면서 깊은 맛이었다. 까만 솥뚜껑 위에 쓱싹 비빈 볶음밥이 꼬들꼬들해져갔다. 전 감독이 “볶음밥에 계란 하나만 넣어달라”고 주문했다. 탱글탱글한 계란이 볶음밥 위에서 소리없이 익어갔다.

소맥이 몇 잔 돌자 다들 불콰해졌다. 이야기가 술술 나왔다. 1990년대 두 사람은 무용수로서 황금기를 보냈다. 1994년에는 두 사람이 함께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로 입단해 ‘부부 발레스타’로 인기를 모았다. 그러던 중 1995년 2월19일 서울발레시어터를 창단했다.

전 감독의 이야기다. “세상에 다 똑같은 발레단만 있으면 재미없잖아요. 순수하게 고전발레를 하는 단체도 있어야 하지만, 우리같이 ‘이상한’ 실험적인 단체도 나와야 국내 무용계에 경쟁력이 생기죠. 언제까지 ‘백조의 호수’만 따라 하고 있을 건가요.”

야심차게 출발했지만 지난 19년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힘든 길이었다. 두 사람은 단언했다. “이렇게 힘든 길인 줄 알았다면 절대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전 감독의 설명이 이어졌다. “창단 뒤 자리를 좀 잡나 했는데 1997년 외환위기가 터졌어요. 공연장이 텅텅 비었죠. 1999년에는 예술의전당 상주단체에 들어갈 뻔하다 당시 문화체육관광부의 일방적인 계약해지 통보로 길거리에 나앉게 되기도 했고요. 그 뒤에도 금융위기, 신종플루, 세월호 등 3년마다 고비가 찾아왔어요.”

사회가 건강해야 예술이 인정받아

문득 궁금해졌다. 그렇게 힘이 든다면 그만두면 되지 않을까. 자존심 때문일까. 맥주잔이 다시 돌았다. “자존심이 뭐가 중요해요. 다만 처음 단원들에게 약속한 걸 지키기 위해서예요. 이렇게 얘기했어요. 최고의 연봉을 약속하겠다고. 대한민국 무용계가 더 성장하려면 우리 같은 규모의 단체가 10개쯤 더 생겨야 해요. 우리가 힘겹게 19년간 이끌어오다 실패하면 그다음 누가 발레단을 만들겠어요. 우리가 성공해야 후배들이 뒤따라올 것 아니겠어요. 발레는 사치스런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건 발레를 잘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예요. 미국이나 유럽의 사례를 보면 발레단 하나가 지역 커뮤니티 발전에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전 감독)

SBT는 앞으로 어떤 길을 갈까. “지난 15년간은 표 한 장이라도 더 팔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어요. 그러다 5년 전 노숙인들에게 발레를 가르치면서 깨닫게 됐어요. 우리가 속한 사회가 건강하고 행복해져야 예술이 인정받을 수 있구나 하고 말이죠. 이걸 19년 전에 깨달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노숙인 발레를 계기로 부부 발레, 장애인 발레 등 다양한 사회공헌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요. 창작활동과 사회공헌 사업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싶어요. 내년이 창단 20주년입니다. 후배들에게는 제가 하는 경제적인 고민을 좀 덜어주고 자리를 떠나고 싶어요.”(김 단장)
■ 김인희·제임스 전의 단골집 명품 삼겹살
도톰한 오겹살 일품…직접 기른 유기농 채소 무제한 제공


서울 삼전동에 있는 ‘명품 삼겹살’은 하재학 대표가 2003년부터 운영해온 솥뚜껑 삼겹살 전문점이다.

대표 메뉴는 도톰한 오겹살(1만2000원)이다. 항정살(1만3000원), 차돌박이(1만원)를 찾는 손님도 많다. 솥뚜껑에 노릇노릇 구운 고기 한 점에 구운 김치, 콩나물, 파무침을 함께 싸 먹는 맛이 일품이다.

하 대표는 경기 가평군 설악면에서 주말농장을 운영 중이다. 이곳에서 재배한 상추, 깻잎, 당귀, 봄동, 고추 등 각종 채소류를 식당에 가져와 무제한 제공하고 있다. 농약 없이 재배한 유기농 채소들이다.

평일 점심시간(오전 10시~오후 3시)에는 식사류도 판다. 김치찌개와 된장찌개 정식(이상 5000원), 고추장 불고기 정식(6000원)이 있으며 고기류에 곁들일 수 있는 후식 메뉴로는 직접 솥에 눌러 만든 누룽지(5000원), 차돌된장찌개(2000원) 등이 있다.

오후 영업시간은 5시부터 11시까지다. 일요일은 휴무. 삼전동 우체국에서 도보로 5분 걸린다. (02)419-2550

■ 김인희 서울발레시어터 단장

▷1980~1982년 모나코왕립발레학교 유학 ▷1983년 선화예술고 졸업 ▷1984~1993년 유니버설발레단 수석무용수·지도위원 ▷1994년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1995년 서울발레시어터 창단 ▷2013년 이화여대 공연예술대학원 석사

■ 제임스 전 서울발레시어터 예술감독

▷1985년 미국 줄리아드 예술대학 졸업 ▷1984년 모리스베자르발레단 단원 ▷1985~1987년 미국 플로리다발레단 단원 ▷1987~1993년 유니버설발레단 솔리스트 ▷1994년 국립발레단 주역 ▷1995년 서울발레시어터 창단 ▷1999년~ 서울발레시어터 상임안무가 ▷2003년~ 한국체육대 생활무용학과 교수

김인선 기자 indd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