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기기를 만드는 기업 가운데 상당수가 제품 연구개발(R&D) 단계에서 의사들의 의견을 구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의료기기를 쓰는 의사들의 의견을 수시로 접해야 시행착오를 줄이고 좋은 제품을 개발할 수 있는데 의사들과의 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수술 장비를 만드는 한 의료기기 업체 관계자는 “개인적으로 아는 의사에게 시제품을 들고 찾아가 10분 정도 면담하는 데 그치고 있다”며 “자문할 의사나 병원을 찾을 수 없어 독자적으로 개발했다가 의사들이 불편을 호소해 다시 개발하는 일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기업과 병원 동떨어져

국내 의료기기 시장의 97%는 중소기업이 만든 제품이 차지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지난해 매출 1억원 미만 업체 수는 1122개로 전체의 49.28%에 달했다. 100억원을 넘는 기업은 3.03%(69개)에 불과하고, 500억원이 넘는 업체는 삼성메디슨 오스템임플란트 바텍 등 9개에 그쳤다.

의료기기는 일반 소비재와 달리 사람을 대상으로 ‘임상시험’을 거친다. 제품이 효과가 있고 안전한지 실험하는 과정에 병원과 의사가 참여한다. 하지만 의료기기 업체들이 제품을 개발하는 단계에서 의사에게 자문해 아이디어를 모으는 경우는 많지 않다.

영세한 의료기기 업체들은 의사에게 줘야 하는 자문료가 부담이 된다. 자금 여력이 있는 의료기기 업체들은 자문료를 주는 행위를 ‘리베이트’로 오해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걸림돌로 지적한다. 종합병원 등에서 일하는 우수한 의사들이 특정 의료기기 업체의 제품 연구개발에 의견을 주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윤형로 연세대 의공학부 명예교수는 “의료기기 후발국인 한국은 선진 기업을 따라잡기 위해 기업과 의사 간 협력이 더 필요하다”며 “의사들이 현장에서 생각한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의료기기 개발에 반영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종합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들은 진료에 매달리다 보니 시간을 내기가 어려운 것도 문제다. 한 대학병원 의사는 “임상 현장에서 필요한 아이디어가 있어도 시간과 비용 등의 문제로 상품화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전했다.

◆“R&D 협력모델 확대돼야”

세계 의료기기 시장은 2012년 350조원에서 2018년 510조원으로 연평균 6.7%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 의료기기 시장은 4조6000억원(2012년 기준), 수출액은 2조5000억원으로 한국 의료기기 산업이 세계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2%에 그치고 있다.

국내 의료기기 산업의 세계시장 점유율이 낮은 것은 선진국 대비 의료기기 기술 수준이 60~70%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한성룡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 전자전기 산업평가단 단장은 “신제품을 개발하기 위한 R&D에 적극 나서려면 기업과 병원 간 R&D 연계모델을 확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예컨대 신체 모든 부위에 방사선 수술이 가능한 ‘방사선 치료 시스템’을 만든 사이버나이프사가 R&D 초기 단계부터 미국 스탠퍼드대병원과 협력한 것처럼 한국도 의료분야 산·학 연계체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미현 기자 mwis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