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언 기자 misaeon@hankyung.com
김병언 기자 misaeon@hankyung.com
2002년 경북 의성. 잔뜩 성난 농민 5만명이 의성역 광장 일대에 모였다. 값싼 중국산 마늘 수입을 막기 위해 높은 관세를 매겼다가 한국산 휴대폰 수입 금지라는 중국의 강공에 휘청거렸던, 이른바 ‘한·중 마늘 파동’ 때문이었다. 수습 과정에서 정부가 중국과 ‘비밀 협상’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농심(農心)이 들끓었다. 농민들은 연일 집회를 열고 농기계를 불태우는 과격 시위를 벌였다.

당시 농림부(현 농림축산식품부) 농산물유통국장이던 김재수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사장은 한달음에 현장으로 달려갔다. 정부 당국자의 등장이 예민한 농민들을 더 자극할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지만 김 사장은 망설이지 않았다. 주무국장으로서 책임 지고 합리적인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는 생각만 했다. “고민 끝에 마늘 재배 기계화를 제안했습니다. 도망치지 않고 현장에서 설득하다 보니 겨우 답이 나오더군요.”

농업과 우연한 만남

[한경과 맛있는 만남] 김재수 농수산식품유통公 사장, 마늘·광우병…'파동' 때마다 현장에
김 사장의 공직 생활은 ‘파동’의 연속이었다. 농림부 과장일 때 농안법 파동을 수습하고 우루과이라운드를 마무리했다. 국장 때 한·중 마늘 파동이 터졌다. 주미 한국대사관 농무관 시절에는 광우병 사태를 겪었다. 굵직한 농정 파동의 현장에는 언제나 그가 있었다. 주변에서 ‘일을 몰고 다니는 운명’이라는 농담을 할 정도였다.

그렇게 농림 행정에 몸담은 지 올해로 34년. 김 사장을 지난 11일 서울 연희동에 있는 한정식집 ‘수빈’에서 만났다. 곱게 차려진 밑반찬 중 그는 가장 먼저 삼색나물 무침을 권했다. “이 집 나물이 맛있어요. 조미료를 안 써서 속이 편할 겁니다.” 식재료는 주인이 전국 곳곳을 다니며 직접 공수한단다. 반찬 하나하나에 정성이 담겼다는 게 김 사장의 설명이다. 잘 데친 곰취에 쌀밥과 ‘깡장(강된장)’을 함께 넣어 먹으니 소박하면서도 깊은 맛이 났다.

농업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김 사장이지만 처음부터 뜻이 컸던 것은 아니었다. 행정고시 합격 후 첫 근무처는 국세청이었다. 하지만 세금을 걷는 일은 적성에 맞지 않았다. 세금 부과와 징수보다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고 실행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마침 다른 부처에서 국세청으로 오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었다. 농림부 사무관이었다. “만약 또 다른 부처에서 국세청 근무를 원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전 아마 그 부처로 갔겠지요? 평생을 함께해온 농업과의 인연은 그렇게 ‘우연’으로 시작된 겁니다.”

주요리인 낙지볶음과 황태구이, 떡갈비까지 나오자 널따란 상이 꽉 찼다. 요즘 유행하는 퓨전 한정식보다는 정통 한정식에 가까운 차림이다. 낙지볶음은 고춧가루를 써 짜지 않고 맛이 깔끔했다. 젓가락질하느라 잠시 멈춘 대화를 이어갔다.

농림부 유통통계원에 배치됐다. 1979년의 일이다. 농가 소득통계 등을 관리하며 한국 농업의 실태에 대해 감을 잡기 시작했다. 쉴 틈 없이 사무관 시절을 보내고 식량·유통·농업 등 9개 부서 과장을 거쳤다. 바쁜 나날이었다. 가족들과 휴가 한 번 제대로 못 갔다. “사실 2003년 미국 농무관 근무 시절에 휴가를 가려고 했습니다. 9시간 걸려 플로리다 해변에 도착했는데 글쎄 광우병 파동이 터졌습니다. 바로 워싱턴으로 차를 돌려야 했지요.”

김 사장은 지난 30여년간 각종 파동을 겪으며 장·차관이 경질되는 모습을 수차례 지켜봤다고 했다. 공직자로서 한계를 느끼고 좌절도 했다. “처음엔 왜 내가 가는 곳마다 일이 터질까 싶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만큼 우리 농정 역사가 고비 고비마다 긴장과 파동의 연속이었던 것입니다.”

“공무원 같지 않다”

[한경과 맛있는 만남] 김재수 농수산식품유통公 사장, 마늘·광우병…'파동' 때마다 현장에
수빈은 농림부 과장 시절에 인연을 맺은 이종미 이화여대 식품영양학과 명예교수에게 소개받은 식당이다. 한 번 들른 뒤 깔끔한 맛에 반해 단골이 됐다. 이날 자리를 함께한 이 교수는 김 사장과 20년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이 교수는 김 사장을 “공무원 같지 않은 공무원이었다”고 했다. 보통 공무원과 달리 “얘기가 되는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책임 지기 싫어하는 공무원들에게 지쳐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김 사장은 달랐어요. 새로운 얘기도 잘 받아들이고 적극적이어서 말이 통했죠.”

두 사람이 처음 만난 20년 전에는 식품산업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농림부는 전통 농업만 신경 썼다. 하지만 김 사장은 농업이 기존 개념에만 머문다면 미래가 없다고 봤다. 생산 자체도 중요하지만 농축산물로 만드는 ‘음식’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무관 시절부터 농림부에 식품가공과를 신설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다.

주장은 먹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들어맞았다. 현재 식품산업 규모는 150조원에 달할 정도로 커졌다. 미래 농업의 맥을 짚은 것이다. “늘 하는 업무여도 관성적으로 처리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새롭게 보려 했지요. 그러다 보면 생각지 못한 아이디어가 나옵니다. 계속 보면 큰 줄기도 잡히지요.”

이야기가 한창 무르익는 도중 도라지를 따끈하게 삶아 콩고물에 무친 음식이 맛보기로 나왔다. 정식 메뉴가 아니라 다음달부터 내놓을 예정인 신메뉴란다. 쌉싸름한 도라지 향에 고소한 콩고물이 어우러져 독특한 맛을 냈다. 김 사장은 끊임없이 연구하고 시도해 새로운 요리를 내놓는 것이 이 집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라고 했다. 관성을 꺼리는 김 사장의 모습과 닮았다는 생각이 스쳤다.

최근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인 중국 알리바바와의 협력에 성공한 것도 ‘발상의 전환’ 덕이었다. 기존엔 한국 농식품을 해외에 알리는 통로는 전시회밖에 없었다. 한계가 뚜렷했다. 김 사장은 중국 온라인 시장을 공략하면 유통, 광고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알리바바에 먼저 손을 내밀었다. 한국 농식품을 팔면 알리바바에도 이익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결국 성공했습니다. 정부끼리 검역 협상을 하다 보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다른 길, 지름길을 찾아야 합니다.”

김 사장은 새벽마다 집 뒷산을 오른다. 하지만 한 경로로 가지 않는다. 매번 다른 길로 간다. 익숙해짐을 경계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매일 같은 산을 오르면 지루하지 않으냐고 묻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같은 산이라도 다른 각도로 바라보면 다르게 보입니다.” 김 사장은 새벽 산에 다녀올 때마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른다고 했다.

한식 세계화의 꿈

“어떻습니까. 우리 한식, 참 맛있지요.” 그는 식사 중에 몇 번씩 “한식을 우습게 봐선 안 된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양식 일식을 고급 요리로 여기고 한식은 폄하하는 국내 분위기가 안타까운 듯했다. “지방마다 오랜 세월 전수돼 온 귀한 음식 비법이 있지 않습니까. 이 좋은 걸 우리만 먹긴 아깝지요.”

한식 세계화 사업은 사무관 시절부터 고민하기 시작해 미국 농무관을 지낼 때 구체화한 프로젝트라고 했다. 미국 근무 때 각국 외교관을 초청해 한국음식 시식회를 열었다. 참석자들은 하나같이 한식을 칭찬하며 조리법을 물었다. “그때 음식 한류의 가능성을 봤습니다.” ‘한식 세계화’라는 단어를 처음 쓴 것도 김 사장이다.

그만큼 한식에 애착이 크다. 한식 세계화 사업의 성과가 미진한 것 아니냐는 질문에도 “절대 그렇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단호한 표정이었다. 미국 워싱턴DC의 한식 인지도가 5년 만에 9%에서 55%까지 높아질 정도로 가시적인 성과가 있었다는 것. 앞으로는 높아진 인지도를 바탕으로 식문화를 널리 퍼뜨리는 것이 관건이라고 했다. “요리학원 원장이 나가서 요리 시연을 보여주는 수준으로는 안 됩니다. 인테리어 전문가와 음악가, 식기 전문가, 식품영양학자가 모두 달라붙어야지요. 한옥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식당, 그 식당에 울려퍼지는 전통 음악, 한식을 담는 식기까지 패키지로 세계화해야 합니다.”

후식으로 나온 식혜를 한 모금 마신 뒤 그는 말을 이어갔다. 이야기의 깊이에서 그가 한식 세계화를 오랜 기간 고민해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단순히 불고기, 김치 같은 음식 하나를 들고 나갈 수는 없습니다. 식문화 자체를 내보내야 합니다. 한식의 세계화 가능성, 충분합니다.”
[한경과 맛있는 만남] 김재수 농수산식품유통公 사장, 마늘·광우병…'파동' 때마다 현장에
김재수 사장의 단골집 수빈
속이 알찬 간장게장·두툼한 떡갈비…외식 장소로 '안성맞춤'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 있는 ‘수빈’은 정원이 딸린 가정집을 개조해 2002년 문을 연 한정식집이다. 두툼한 떡갈비와 맛깔스러운 간장게장으로 인기가 많다. 식당 주인이 경기 고양시에 있는 밭에서 무 배추 참나물 등 쌈채류를 직접 재배한다.

[한경과 맛있는 만남] 김재수 농수산식품유통公 사장, 마늘·광우병…'파동' 때마다 현장에
대표 메뉴는 떡갈비 정식(1만9000원) 간장게장 정식(3만5000원) 황태구이 정식(1만2000원) 깡장비빔밥 정식(8000원) 등이다. 여럿이 가면 수빈 정식 세트 메뉴를 주문해 간장게장 떡갈비 황태구이 깡장 등을 6만9000원(4인 기준)에 맛볼 수 있다. 1인당 1만7250원 꼴이다. 푸짐한 반찬이 손님을 끄는 비결이다. 버섯탕수육 곰취 참나물무침 삼색나물 우엉조림 호박샐러드 멸치볶음 브로콜리 등 20여 가지 반찬이 나온다. 대부분 주인이 직접 재배한 농산물로 정성껏 만든다. 식감이 좋고 간이 세지 않다. 반찬 종류는 계절마다 조금씩 바뀐다.

합리적인 가격에 푸짐하게 한정식을 즐길 수 있어 가족 외식 장소로 적격이다. 2개층에 테이블 25개를 갖추고 있지만 예약하지 않으면 자리를 잡기 어렵다. 영업시간은 오전 11시부터 밤 10시까지. 연중무휴다. (02)307-9979

한·중 FTA 협상 땐 공무원들 단골 자문

김재수 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사장은 30여년의 공직생활 동안 내공을 깊게 쌓은 행정가라는 평을 듣고 있다. 최근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때도 후배 공무원들이 자주 조언을 구했다는 후문이다. 2009년 농촌진흥청장으로 부임해 존폐 위기에 있던 조직을 1년 만에 업무평가 1위 기관으로 만든 것으로도 유명하다.

고은이/조진형 기자 koko@hanky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