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보 김기창 화백의 ‘청산귀우도’.
운보 김기창 화백의 ‘청산귀우도’.
‘한국 화단의 거장’ 운보 김기창 화백(1913~2001)은 8세에 장티푸스로 인한 고열로 청각이 마비돼 귀머거리가 됐다. 청각 장애를 딛고 한국 근대미술과 현대미술의 교두보 역할을 한 그는 17세가 되던 1930년 한국화가 이당 김은호에게 전통적인 산수화와 섬세한 인물화 기법을 배워 그림을 시작했다. 그는 24세 때 제16회 조선미술전람회(鮮展)에서 작품 ‘고담’으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연속 4년간 특선을 거머쥐었다. 산수 인물 화조 등 한국화에서부터 추상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업을 통해 자신의 감성과 개성을 살린 작품을 추구했던 그는 1975년 1만원짜리 지폐에 세종대왕 얼굴을 그려 더 유명해졌다.

운보의 파란만장했던 삶을 반추하는 판화전이 1~12일 서울 중림동 한국경제신문 1층 한경갤러리에서 열린다. 운보의 작품세계는 한 가지로 일관된 게 아니라 언제나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변화 그 자체였다. 동양화의 현대적 재창조를 주장한 그는 초기의 구상 작업에서 중기에는 생활, 정물, 춤을 소재로 한 입체작업과 반추상, 추상, 문자화 등 다양한 실험으로 왕성한 창작욕을 보였다.

‘청록산수’를 주제로 한 이번 전시에는 화조도를 비롯해 산수도, 수렵도, 악공, 달밤 등 구상 작업을 판화로 제작한 20여점이 걸린다. 김 화백의 1930~2000년까지 70년간의 화맥을 짚어보고 한국 전통의 동양화에서 벗어나 유머러스하고 독특한 운보의 미학세계를 탐험할 수 있는 자리다.

운보의 작품에는 현실 안주를 기피하는 창의적인 예술가의 진취적인 기질이 화면 곳곳에 묻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백두산도’는 급진적이고도 역량 있는 변화의 단계를 거치면서 독자적인 화풍을 보여주는 1980년대 작품으로 영산(靈山)의 장엄미를 폭포수처럼 쏟아냈다.

1976년에 그린 ‘청산귀우도’를 판화로 만날 수 있다. 소를 몰고 귀가하는 두 남정네의 모습은 관람객에게 ‘마음의 평온’을 전달해준다. ‘바보 화조도’는 활짝 핀 꽃과 새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으로 귀가 들리지 않는 상태에서 눈으로만 세상을 느껴야 했던 자신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960년대에 불사조를 그린 ‘태양을 먹는 새’도 판화 작품으로 감상할 수 있다. 꺼질 줄 모르는 생명의 힘으로 용솟음치는 조형에의 욕구를 화면에 형상화해서인지 강력한 원색미가 배어 있다. 이 밖에 악공들의 연주하는 모습을 입체파적으로 표현한 ‘악사’, 거칠면서도 힘이 넘치는 호랑이와 독수리를 그린 판화에서도 운보의 호방한 붓맛과 리듬감을 느낄 수 있다. 전시된 판화 가격은 시중보다 10~30% 싸다. (02)360-4232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