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관계(關係)
벌써 12월, 격동의 한 해가 또 마감돼간다. 금년 달력의 마지막 페이지를 펼쳐보니 올해도 어김없이 메모로 가득하다. 송년회 또는 망년회라는 이름으로 각종 모임이 빼곡히 예정돼 있다. 그동안 눈 딱 감고 참석하지 않았던 모임이 많지만, 은행장이 되고 나니 여기저기서 꼭 참석하라는 압력 같은 부탁이 많아 고민스럽다. 연말을 맞아 이른바 학연, 지연, 혈연으로 맺어진 사람들끼리 그 특별한 ‘관계(關係)’를 다지는 모임의 성수기가 도래했나보다.

사실 우리는 누군가의 자녀, 형제로 태어나 남편, 아내, 부모, 친구, 이웃으로 죽을 때까지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사람을 그냥 ‘인(人)’이라 하지 않고, 굳이 관계를 의미하는 ‘간(間)’을 넣어 ‘인간(人間)’이라고 표현했는지도 모르겠다. 불교에서는 ‘연기(緣起)’라고 하여, 이 세상 만물이 수많은 원인과 결과에 의해 생멸(生滅)하는 상관관계에 있음을 강조하고, 음양 사상도 음과 양은 독립된 것이 아니라 빛과 그림자처럼 항상 함께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이런 관계 중심적 사상의 영향으로 동양에서는 사람을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상호 의존적 존재로 인식하여 관계를 더욱 중요시했다고 한다.

물론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인 이상 서양에서도 관계는 중요하다. 학교나 기업에 들어갈 때 지인의 추천 문화가 오래전부터 자리 잡았고, 관계를 잘 맺기 위해 아이비리그 같은 명문대학에 진학하고자 치열하게 경쟁도 한다.

이렇듯 관계는 동서양을 불문하고 중요하다. 개인이 주변 사람들과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삶의 기반이 돼주고, ‘나’보다는 ‘우리’를 강조하여 공동체의 결속력을 높이는 긍정적 기능을 한다. 하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일례로 친분 관계를 중시하는 중국의 ‘관시(關係)’문화는 중국 경제와 사회 전반에 걸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지만, 부정부패의 만연으로 중국은 범국가 차원의 부패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연말을 맞아 모임이 잦은 지금, 우리 각자는 모임에 나가는 이유가 사람들과 우의를 다지고, 인간관계의 폭을 넓히며, 좋아하는 것에 대해 함께 의견을 나누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에서인지를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김주하 < 농협은행장 jhjudang@nonghyu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