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반도체 유해물질 논란의 그림자
한 반도체회사의 임원은 최근 지인으로부터 깜짝 놀랄 얘기를 들었다. 반도체 생산 라인에 근무하는 자신의 아들에게 “유해물질 때문에 걱정되니 회사를 그만두라”고 했다는 것. 정색하고 반도체 라인에서 나오는 유해물질은 공기 중에 섞여 있는 것보다 적다고 설명했는데도 지인은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겠느냐”는 반응을 보였다고 전했다.

2007년 6월 삼성전자 기흥공장 반도체라인에서 근무하다 급성백혈병으로 사망한 황유미 씨 유족이 산업재해신청을 하며 불거진 ‘반도체 라인 유해물질 발생’ 논쟁이 8년째 이어지고 있다. 수많은 조사 결과가 나왔지만 갈등은 좀체 가라앉지 않고 있다. 서울 서초동 삼성사옥 앞에선 1주일에 한 번꼴로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인권지킴이) 회원들이 시위를 하고 있다.

삼성은 지난 2일 이 문제를 해결할 조정위원으로 백도명 서울대 보건대학원 환경보건학과 교수 등 2명을 선정하는 데 합의했다. 그간 백 교수는 삼성 측이 제시한 유해물질에 대한 수많은 데이터를 무시한 채 “삼성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을 고수해왔다. 일각에선 “저격수를 안방에 들인 격”이라는 평가까지 나온다. 유가족과의 협상을 맡고 있는 백수현 삼성전자 전무는 “이 문제를 더 이상 끌 수 없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결정한 것”이라고 했다.

삼성의 절박함이란 다름 아닌 반도체 산업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메모리 반도체는 조선, 해운 등 주력 산업이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세계시장 1위를 지키며 막대한 수익을 거두고 있는 품목이다. 기술진보가 빠르고 경쟁이 치열한 탓에 인재 확보가 경쟁력 유지의 핵심이다. 유해물질 논란이 장기화돼 핵심 인재들이 반도체 업계를 외면한다면 삼성과 SK하이닉스는 치명타를 맞을 수도 있다.

직원들의 안전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삼성과 SK하이닉스는 만에 하나라도 직원들에게 위해가 될 수 있는 요소가 발견되면 철저히 없애야 한다. 하지만 뚜렷한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회사에 모든 책임이 있는 것처럼 몰아붙이는 분위기는 바람직하지 않다. 백 교수를 조정위원으로 선정한 것을 계기로 백혈병 논란이 신속하게 처리되길 기대해본다.

남윤선 산업부 기자 inkling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