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부끄러운 '新관치금융'
“제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이순우 우리은행장이 지난 1일 연임 포기 의사를 공식적으로 밝히기 앞서 기자에게 건넨 말이다. 대놓고 말은 못했지만 ‘외압’으로 인해 연임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속사정을 에둘러 말한 것처럼 들렸다.

이 행장은 단순히 누군가로부터 전화 한 통 받고 물러나기로 한 건 아니다. 연임을 포기하기까지 그의 속내는 복잡했다. 최근 한 달간 ‘악성 루머’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난데없이 청와대에 이 행장에 대한 투서와 비방이 쏟아지면서다. 이 행장이 작년 6월 우리금융 회장에 오를 당시 인사검증 과정에서 걸러진 내용이 대부분이었지만, 결국 판세는 뒤집어졌다. ‘보이지 않는 손’이 서금회(서강대 출신 금융인 모임) 멤버인 이광구 우리은행 부행장을 은행장으로 앉히기 위해 이 행장의 결격사유를 다시 끄집어낸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는 이유다.

홍성국 사장을 선임한 대우증권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유력 후보로 꼽혀온 이영창 경영고문(전 부사장)은 ‘꽃값 부당사용’ 논란이 터지면서 주저앉았다. 덕분에 역시 서금회 멤버인 홍 사장이 선임됐다.

금융권에선 요즘 ‘신(新)관치’ 또는 ‘정치금융’이 등장했다는 우려가 나온다. 특정 인물을 금융사 최고경영자(CEO)에 앉히기 위한 수법도 한층 교묘해졌다는 분석도 있다. 물러나게 할 금융사 CEO를 대상으로 각종 비리 의혹을 제기해 상처를 내는 수법 탓이다. 특정 인물에 대한 내정설을 흘려 여론몰이를 하는 것도 새로운 수법으로 자리잡고 있다. 누군가 하영구 전 한국씨티은행장을 은행연합회장으로 내정했다는 얘기를 흘려 미리 바람을 잡은 게 대표적 사례다.

과거 정부 고위 관료가 퇴진시켜야 할 금융사 CEO에게 직·간접적으로 ‘물러나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던 것에 비하면 방법이 너무 치사한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온다. 예전엔 그나마 ‘될 만한 사람’ 중 한 명을 골라 낙하산으로 내려보냈지만, 최근엔 예상 밖 인물을 앉히는 것도 달라진 점 중 하나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결론은 뻔하다. 우간다보다 못하다는 한국 금융의 경쟁력은 더 떨어질 수밖에 없다. 참 부끄러운 신관치금융시대다.

장창민 금융부 기자 cm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