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안하는 일만 찾은 '신 시티의 대부'…카지노를 복합 리조트로 '판' 을 바꾸다
세계 최대 도박의 도시인 미국 라스베이거스는 한때 ‘신 시티(Sin city·죄의 도시)’로 불렸다. 1931년 네바다주에서 카지노장이 합법화되고, 1946년 현대식 카지노가 문을 열면서 마피아가 세를 넓혔기 때문이다. 각종 범죄와 매춘으로 얼룩졌던 라스베이거스는 1990년대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미라지, 베네치안, 만달레이 베이, 벨라지오 등 대형 호텔과 고급 리조트가 들어서면서 365일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꿈의 도시’가 됐다.

‘죄의 도시’가 ‘꿈의 도시’로 탈바꿈한 중심에는 맨손으로 카지노 제국을 세운 ‘신 시티의 대부’ 셸던 애덜슨 샌즈그룹 회장(81)이 있다. 세계 최대 카지노 회사인 라스베이거스 샌즈와 자회사를 거느린 그는 2000년 이후 미국을 넘어 마카오, 싱가포르 등 아시아로 영역을 확장했다. 미 경제 격주간지 포브스는 “애덜슨 회장은 지난해 가장 많은 돈을 번 미국인”이라고 최근 발표했다. 2012년 말 220억달러였던 그의 재산은 지난해 말 370억달러(약 39조1645억원)로 불었다. 하루 4100만달러(약 434억원)씩 재산이 증가한 셈이다.

도박장에서 리조트로…‘판’을 바꾸다

애덜슨 회장의 어린 시절은 암울했다. 유대인인 아버지는 우크라이나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와 택시 운전을 했다. 보스턴 외곽 흑인 밀집지역인 도체스터에서 태어난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여섯 식구가 한방에 살던 시절’로 기억한다. 어렸을 때부터 신문 등을 팔았던 애덜슨은 12세 때 삼촌에게 빌린 돈으로 직접 신문 가판대를 열어 첫 사업을 했다. 뉴욕 시립대를 중퇴한 그는 길에서 아이스크림도 팔아보고 베이글도 팔았다. 그는 “1960년대엔 친구들과 여행사를 차리는 등 지금까지 50개 넘는 직업을 거쳤다”고 말한다. 20대 초반 그는 우연한 기회에 부동산 중개업에 뛰어들었고, 사업 기반을 쌓은 뒤 전시사업으로 눈을 돌렸다.

1979년 미국 최대 컴퓨터 쇼인 컴덱스(COMDEX)를 설립했다. 이 전시회는 봄엔 시카고나 뉴욕, 가을엔 라스베이거스 등 1년에 두 번씩 개최되면서 1990년대 말까지 세계 최대 컴퓨터 전시로 명성을 과시했다. 애덜슨이 라스베이거스와 인연을 맺은 것도 컴덱스 때문이었다. 그는 1제곱피트(약 0.03평)를 15센트에 빌린 뒤 전시업체에 제곱피트당 40달러에 파는 방식으로 막대한 돈을 벌었다.

컴덱스 때문에 라스베이거스를 드나들던 그는 도박장 하나로는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1989년 대형 컨벤션센터 등 각종 부대시설을 지어 라스베이거스 최초의 복합 리조트 단지 건설에 나섰다.

그가 카지노 사업에 뛰어든 건 그의 나이가 50이 된 1988년도다. 1991년에는 라스베이거스 사람들이 상상도 못했던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재혼한 아내와 신혼여행으로 이탈리아 베네치아를 다녀온 뒤 라스베이거스에 ‘물의 도시’를 짓겠다고 결심한 것. 물이 귀한 사막도시에 베네치아의 상징인 곤돌라와 인공 운하, 뱃사공을 접목한 ‘베네시안 리조트’를 건립한 그는 이 리조트를 시작으로 라스베이거스에 ‘초호화 카지노 리조트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받는다.

불 같은 추진력…위기 때 亞로 사업 확장

그 후 애덜슨은 아시아 시장에 집중했다. 마카오에 2004년과 2007년에 각각 ‘샌즈 마카오’와 ‘베네시안 마카오’를 열었고 2010년에는 싱가포르 최초의 카지노인 ‘마리나베이 샌즈’를 열었다. 도박은커녕 길거리 흡연조차 엄격하게 법으로 규제당하는 싱가포르에 카지노가 들어선 것 자체로 아시아에서 화제를 모았다.

애덜슨 회장은 불 같은 추진력으로 유명하다. 위기 때 추진력은 더 빛을 발했다. 2006년과 2007년 두 해 연속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에 이어 포브스 선정 미국 부호 3위에 올랐던 그의 자산은 2008년 금융위기를 거치며 쪼그라들었다. 금융위기가 본격화하면서 호텔·카지노 사업은 직격탄을 맞았고, 2007년 주당 140달러였던 라스베이거스 샌즈의 주가는 2009년 1.38달러까지 떨어졌다. 2008년 마카오와 싱가포르에 짓고 있던 카지노 리조트사업은 좌초 위기에 처했고, 부채는 120억달러에 달했다.

휴지조각이 된 재산 때문에 무너질 것 같았던 그는 오히려 더 과감한 결단을 내리기 시작했다. 샌즈그룹이 위기에 허덕이자 자신의 돈 10억달러를 투입해 샌즈의 자금 운용에 숨통을 틔웠다. 금융시장이 서서히 안정을 찾으면서 부도설도 사라졌다. 샌즈그룹은 2009년 말 자회사 샌즈차이나를 통해 홍콩 증시에 상장, 25억달러를 조달했다. 지난해에는 샌즈그룹 주가가 70% 폭등, 재산도 불어났다. 현재 샌즈그룹의 시가총액은 640억달러에 달하고, 그는 지분 52%를 쥐고 있다. 현재 라스베이거스 샌즈의 영업이익 가운데 90%는 아시아 시장에서 발생한다.

통 큰 기부자이자 공화당의 ‘큰손’

그는 피부암의 일종인 흑색종을 앓고 있다. 오른쪽 다리는 신경계 질환 때문에 잘 못 쓴다. 외출할 때는 지팡이를 쓰고 있다.

건강이 악화되면서 그는 전 세계 200명의 과학자의 70개 기관을 지원하는 재단을 세웠다. 자신과 아내의 이름(미리암)을 딴 ‘미리암 셸던 애덜슨 재단’이다. 그는 “어릴 때 집이 가난해 어머니 아버지가 제대로 병원을 못 다녔다”며 “보통 사람을 위한 의료 발전에 도움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 재단은 서로 다른 분야의 과학자와 의사가 협업으로 연구를 진행해 시너지 효과를 내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미리암은 약물중독 클리닉도 운영하고 있는데, 애덜슨이 전처와 사이에 낳은 아들 두 명이 실제로 약물 중독으로 고통받은 게 계기가 됐다.

미국 공화당과 유대인 관련 단체에 대한 후원금 역시 아끼지 않는다. 애덜슨의 집안은 원래 민주당을 지지했지만, 그는 부가 늘어나면서 확고한 공화당 지지자가 됐다고 한다.

애덜슨 회장은 항상 남보다 먼저 시장에 뛰어든 사람이었다. 컴퓨터 산업이 막 시작될 무렵 컴덱스를 기획했고, 민간 기업 처음으로 컨벤션 시설을 건설했다. 위기 때에도 미래를 내다보며 장기 전략을 세웠다. 그는 “평생 다른 사람이 하지 않은 일을 찾아 헤맸다”며 “남들이 비용에 집착할 때 나는 미래의 그림만 바라본 게 성공 비결”이라고 말했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