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고용의 유연안전성, 불가능하지 않다
불필요한 인력을 정리하지 못하고 계속 월급을 주면서 부양해야 한다면 기업의 부담은 커진다. 지금은 사업이 잘돼 일손이 더 필요하더라도 나중에 어려워질 때 감원하지 못하는 환경에서는 선뜻 고용을 늘리기도 어렵다. 기업들은 필요한 인력을 고용했다가 불필요해지면 자유롭게 해고할 수 있는 유연한 노동시장을 원한다.

그러나 근로자에게 실직은 소득의 단절로서 엄청난 고난의 시작이다. 일자리가 안정적이지 못하면 어렵게 다시 재취업한다고 해도 생계는 기본적으로 불안하다. 그러므로 근로자들은 안전한 직장을 원하고, 이 요구는 한 번 고용한 근로자들을 쉽게 해고하지 못하도록 규제하는 고용보호법제로 구체화됐다. 고용보호법제의 보호를 받는 근로자가 소위 정규직이고 그렇지 못한 근로자는 비정규직이다.

기업이 원하는 유연성과 근로자들이 원하는 안전성은 각각 상대방에게는 서로 재앙이다. 그런데 노동시장의 유연성과 직장의 안전성은 서로 대척적이므로 두 가지를 동시에 누리지는 못한다. 결국 나라마다 국내 사정에 따라서 양대 목표를 적절히 절충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영미권의 노동시장은 해고 자유로 유연성을 보장하는 반면 유럽 대륙은 고용 보호로 안전성을 추구한다.

물론 유연성이 기업에 반드시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지금 다니는 직장에 대한 충성심이 약해지면 그 회사의 직무에만 필요한 고유 기능을 익힐 근로자들의 열의도 떨어지기 마련이다. 소위 평생직장이 제공하는 장점을 누리지 못한다. 고용보호법제도 사용자가 신규 채용을 꺼리는 부작용이 있다. 그리고 해고하기 어려운 정규직의 협상력은 그렇지 못한 비정규직보다 더 강하고 따라서 같은 직무를 수행하면서도 임금이 훨씬 더 높다.

유연안전성(flexicurity) 모델은 노동시장의 유연성과 근로자들의 생계 안전을 동시에 추구한다. 원래 네덜란드에서 시작했지만 지금은 덴마크의 모델이 국제적 관심을 끌고 있다. 고용 보호를 낮춰 유연성을 추구하는 대신 저소득 근로자가 실직하면 받던 급여의 90%를 실업수당으로 지급함으로써 생계안전을 보장한다. 그리고 새로운 직능을 재교육하고 재취업을 알선하는 등 제반 노동시장 활성화 대책으로 고용 안전을 추구한다.

유연안전성 모델은 현재의 직장을 보장하는 고용 보호 대신 높은 실업수당의 소득 안전과 재취업 보장의 고용 안전을 제공한다. 물론 실업수당이 90%에 이르면 실직자가 재취업을 기피하는 도덕적 해이에 빠지기 쉽다. 덴마크는 최근에 격론을 거듭한 끝에 실업수당 지급 기간을 4년에서 2년으로 줄이는 개혁을 단행했다.

실업수당 지급 업무는 국가가 인가한 민간 실업보험기금이 담당한다. 모든 취업자는 소득 수준과 무관하게 매년 510유로씩 이 기금에 출연해야 한다. 실업수당은 1인당 최대 매년 2만7600유로이므로 출연금 규모로만 보면 취업자 100명이 실업자 2명의 실업수당에 해당하는 5만1000유로를 출연하는 구조다. 실업률이 2%만 돼도 취업자 100명이 감당해야 하는 실업자가 2명을 넘으므로 이 출연금만으로는 실업수당을 감당할 수 없고 정부 재정자금이 추가로 투입돼야 한다.

덴마크 고용부 당국자 말에 따르면 호황기에는 보통 재정의 3~5%, 불황기에는 10~15%의 정부 예산이 유연안전성을 위해 투입된다. 경기에 민감한 지출은 실업수당 지급이고, 재훈련, 재교육, 취업 알선 등 노동시장 활성화 사업은 일단 체제만 갖추면 소요비용 규모는 호황기 지출의 절반 수준으로 안정적이라고 한다. 지난 20여년간 덴마크의 산업구조는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같은 산업이라도 직능은 크게 달라졌다. 노동시장 활성화 사업은 노동직능 현대화를 국가가 주도함으로써 기업의 부담을 덜어주기도 한다.

노동시장 유연화는 우리 경제의 큰 과제다. 우리 사회는 소요비용이 크다는 이유로 유연안전성 모델의 채택을 엄두도 내지 못한다. 실업보험을 강화하는 형태로 우리만의 모델을 진지하게 모색하면 어떨까?

이승훈 < 서울대 명예교수·경제학 shoonlee@snu.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