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찌 지점장들 불러놓고 질책 대신 氣살려…전국 1등 본부로
"현장 뛰며 저수익 넘자"…별명도 'Mr. 점프'
갑자기 전화해 지점장이 받으면 "왜 현장 안 나가고 앉아 있나"
하지만 잔뜩 긴장한 임원들에게 내려진 박 회장의 지시는 메모가 필요 없을 만큼 단순했다.
박 회장은 웃으면서 “내 부하는 앞에 계신 9명의 부행장뿐”이라는 한 가지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얘기했다. “조직원이라면 머리를 짜서 창의성을 발휘해야 하고, 그러려면 책임과 권한을 확실히 넘겨줘야 한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자신은 방향성을 제시하는 데 그칠 생각이라며 부행장은 본부장을, 본부장은 부장을 장악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박 회장의 주문은 이처럼 간단했지만 그가 취임한 뒤 10개월여 동안 DGB금융그룹은 만만찮은 성과를 내고 있다. 저금리 여파로 금융회사들이 고전 중인 가운데서도 지난해 수준의 수익을 유지하며 선전하고 있다.
박 회장은 일방적인 지시 대신 스스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관심인 듯 아닌 듯’ 하는 자율의 리더십으로 DGB금융을 변화시키고 있다. “리더의 작은 생각과 태도 변화가 조직의 큰 성과로 이어진다”는 지론이다. 박 회장은 “열심히 하려는 태도가 있다면 사사건건 간섭하기보다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고 지켜봐 주는 게 더 나은 결과를 얻는다”고 말한다.
꼴찌 지점 1등 만든 ‘감싸 안는’ 리더십
‘풀어주고 방목하는 듯한’ 오묘한 리더십은 그를 금융지주 회장으로 만들었다. 2007년 12월부터 꼭 2년 동안 포항 지역을 아우르는 환동해본부장을 지낼 때의 일이다. 당시 환동해본부는 3개 영업본부 중 꼴찌였다.
부임 후 최악의 실적을 확인한 초기 시절, 그는 지점장들을 불렀다. 지점별 지적사항이 담긴 서류가 박 회장 옆 자리에 한가득 쌓여 있었다. 지점장들은 ‘유구무언’의 긴장한 표정으로 얼어 있었다. 하지만 회의 분위기는 이상하게 흘러갔다. 예상과 달리 실적이나 영업전략은 한마디도 언급되지 않았다. 대신 운동 취미 신변잡기 등 재미있고 가벼운 얘기만 하다가 끝났다.
더 이상한 일이 뒤이어 찾아왔다. 카드와 방카슈랑스 부문이 조금씩 나아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본부의 실적이 고공행진을 시작했다. 급기야 3분기와 4분기 내리 전국 1등 본부 자리를 차지했다. 박 회장은 “지점장은 ‘은행원의 꽃’이라 부를 만큼 중요한 자리고, 지점장까지 오른 사람이라면 능력은 검증됐다고 봐야 한다는 생각에 달달 볶기보다 기를 살려주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형님처럼 감싸 안는 본부장을 대하며 지점장들의 스트레스가 줄자 직원들이 신바람나게 일할 수 있게 됐고, 이런 분위기가 고객 서비스 개선과 실적으로 연결됐다는 얘기다.
‘돈’ 대신 ‘공부’로 물려받은 부모님 재산
박 회장은 자신의 독특한 리더십에 대해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영향 때문”이라고 했다. 그의 고향은 경북 경산시 용성면이다. 과수원을 해 집안은 부유했다. 하지만 부모님은 재산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일찍부터 선언했다. 공부는 시켜주겠지만, 이후 결혼이나 취직 시에는 전혀 지원이 없을 것이라는 점도 강조했다. 재산을 ‘공부’로 물려주겠다는 의미였다.
그 철학에 따라 박 회장 7남매는 모두 대학을 졸업했다. 당시 용성면에 대학생이 10명 안팎이었는데 대부분이 집안 사람이었다. 하지만 결혼 취직 등에서는 부모님의 도움이 없었다. 학비 외에 물려받은 재산도 없다. 박 회장은 “고기를 주기보다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게 아버지의 교육철학이었다”고 전했다. 어려울 때마다 나서서 일일이 도와주기보다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줬다는 얘기다.
군 시절 확인한 소통의 중요성
1979년 대구은행 대구 대현동 지점. 입행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은행원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맹호!’ 하고 거수경례를 했다. 군복 차림으로 영업점 문을 밀고 들어온 사람은 수도기계화사단 맹호부대 대대장이었다. 그는 신입 행원에게 ‘군대에서 자리잡을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이후 ‘제대 6개월 내에 부대에서 소집명령을 내면 복귀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대대장과 똘똘한 직원을 놓치지 않으려는 지점장 간 실랑이가 한참 벌어졌다.
박 회장의 신입 행원 시절 이야기다. 학생군사교육단(ROTC) 장교로 맹호부대에서 복무한 그를 눈여겨본 대대장이 직접 찾아와 군 복무를 제안한 것이었다. 육군사관학교 출신을 제치고 ROTC 출신 장교를 찾아온 것은 사람들을 격려하는 박 회장의 리더십이 위계질서가 엄격한 군대에서도 빛을 발했기 때문이다.
소대장으로 복무한 그는 생일을 맞은 병사들을 늘 부대 밖으로 불러내 막걸리를 따라주며 소통했다. 잘못에 대해선 너그럽게, 잘한 일에 대해선 후하게 칭찬하니 부대원들도 마음을 열고 자신을 찾더라는 설명이다. 박 회장은 “관심은 있지만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미덕이 상사에겐 필요하다”며 “조직을 일궈갈 때 중요한 것은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스스로 ‘미스터 점프’ 별명…현장 뛰어
그렇다고 아랫사람을 무한정 풀어놓는 것은 아니다. 조직원들에게 최소한의 원칙과 방식을 정해준다.
지점장들에게는 자리에 앉아 있지 말 것을 주문한다. 지점으로 불시에 전화했을 때 지점장이 전화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지점장은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는 사람이며, 소소한 업무는 직원들에게 맡겨두고 현장을 뛰어다녀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박 회장은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상사가 자리에 있으면 직원들은 업무보다 상사의 행동에 더 신경을 쓴다”며 “‘내가 아니면 일이 안 된다’는 편견을 버리고 현장을 뛰어다녀야 한다”고 강조했다.
물론 그 자신부터 현장을 뛰어다닌다. ‘미스터 점프(Mr. Jump)’라는 별명도 스스로 지었다. 부지런히 현장으로 달리겠다는 각오의 의미다. 저금리·저수익 등 각종 난제를 잘 넘겠다는 뜻도 담겨 있다.
박 회장은 직원들과 소통하기 위해 ‘미스터 점프와의 번개ting’ 행사도 만들었다. 물론 이 자리에서도 업무 얘기는 일절 하지 않는다. 어렵게 회장을 만난 자리에서 일로 스트레스를 주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다. 박 회장은 “즐겁게 일하는 회사를 목표로 점프해 나가는 것이 DGB금융그룹의 지속성장을 담보하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강조했다.
■ 박 회장이 권하는 책
박인규 회장은 평소 직원들에게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적극 추천한다. 책 속에 나오는 문구 때문이다. 주인공 싱클레어는 “새는 알에서 깨어나려 한다. 알은 곧 세계다. 태어나고자 하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박 회장은 직원들에게도 “창의적으로 일하려면 스스로 만들어 둔 고정관념에서 탈피해야 한다”고 자주 얘기한다.
■ 박인규 회장 프로필
△1954년 경북 경산 출생
△1972년 대구상고 졸업
△1977년 영남대 무역학과 졸업
△1979년 대구은행 입행
△2006년 대구은행 서울영업부장
△2010년 대구은행 마케팅그룹장(부행장)
△2014년 DGB금융그룹 회장 겸 대구은행장
박신영 기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