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국민 생활과 밀접한 품목에 대해 으레 행정지도라는 이름으로 가격 결정에 개입한다. 정부가 명시적이건 암시적이건 가이드라인을 주면, 관련업체들이 이를 기준으로 가격을 결정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를 다른 정부 부처가 ‘가격 담합’이라고 문제삼고, 막대한 과징금까지 물리는 일이 번번이 벌어지는 게 한국이다.

라면 사례는 대표적이다. 업체들이 물가당국의 행정지도를 받아가며 ‘라면 거래질서 정상화협의회’를 만들어 가격인상률을 협의해 결정했던 것에 대해 공정거래위원회는 담합이라고 판정했다. 농심 오뚜기 삼양식품 한국야쿠르트 등 4개 업체가 2001년부터 10년간 6차례에 걸쳐 가격 정보를 교환하고 가격인상을 담합했다며 과징금 1354억원을 부과했던 것이다. 법원마저 행정지도가 있었다는 업체들의 소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서울고법은 지난해 11월 공정위의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의 최종 판결은 내년 초로 예정돼 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공정위의 승소 여파로 미국에서도 라면업체들에 대한 집단소송이 시작됐다. 미국 캘리포니아 북부연방지법은 플라자컴퍼니 등 현지 대형마트들이 한국 라면업체의 미국 법인을 상대로 낸 집단소송요건을 지난달 초 승인했다. 이 집단소송에는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식품마트 300여곳이 참여의사를 밝혔고 과징금 규모가 약 8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해졌다. 라면업체들이 국내외에서 최악의 경우 1조원 내외의 과징금을 물어야 할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정부 행정지도에 따라 가격을 결정한 것이 엄벌을 받아야 하는 게 우리 현실이다.

라면 사례는 어제 전경련이 주최한 경영판례연구회 세미나에서 공개됐다. 회사에 손해를 끼치지 않았는데도 배임죄로 처벌받은 CEO, 정부 가이드라인대로 하청근로자에게 모범사원 표창을 줬더니 그것을 ‘실질적 직원이라는 증거’라고 본 판결도 소개됐다. 부처 간 조율 없는 행정부와 경영현실과 동떨어진 판결을 내리는 사법부가 기업을 위기로 내몰고 있다. 참 기업하기 어려운 나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