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서울의 야경
6·25의 포연이 채 가시지도 않은 무렵의 일화다. 배편으로 도착한 국제 지원그룹은 부산의 멋진 야경에 놀랐다. ‘세계 3대 미항’ 이런 것과는 거리가 먼 도시였다. 더구나 폐허가 된 나라였다. 그러나 이튿날 동이 트자 환상은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멀찍이 바다서 감탄했던 입체감 넘친 야경은 높고 낮은 산기슭의 게딱지 같은 판잣집 불빛이었다. 도시의 야경은 이렇듯 때로는 치부도 가린다. 밤이면 거듭나는 도시의 마술이랄까.

물론 지금 부산의 야경이야 천지개벽했다. 마천루숲 해운대와 광안대교의 멋진 모습은 밤에 더 빛난다. 항도의 밤풍경은 국제적 명소로 자리잡고 있다. 경제 성장이 억지 화장발을 걷어내고 고혹적인 자태의 밤도시로 재탄생시켰다.

국제적 대도시들은 저마다 야경으로 이름값을 한다. 맨해튼, 홍콩섬과 구룡반도, 샹젤리제 거리, 와이탄과 푸둥…. 번쩍이는 네온에 형형색색 LED의 조명과학은 건물 하나하나를 예술작품으로 변모시킨다. 해가 지면 도시는 유혹하고 방문객들은 분위기에 먼저 넘어간다. 브로드웨이와 42번가 일대의 휘황찬란하게 번쩍이는 극장들을 찾는 기분에 단 며칠이라도 뉴요커가 되려고 전 세계에서 달려가는 것이다. 록펠러센터 고층 클럽에서 다운타운과 뉴욕항의 명멸하는 야경을 즐기기 위해 비싼 맥주값도 기꺼이 지불한다. 야간의 도시는 빛이다.

독특한 조명에다 관능적이기까지 한 리도쇼나 물랭루주쇼의 빛이 없다면 세계도시 파리의 명성은 불가능하다. 홍콩 야경이 100년 앞을 내다보며 가꿔왔다는 것도 중국계 특유의 과장만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밤에도 불켜둔 건물에 전기요금을 깎아준다. 형형색색 빛의 향연 아래서 먹고 마시고, 쇼와 음악까지 곁들여지니 도심의 야경투어는 오감여행이다.

서울의 야경도 좋아지긴 했다. 한강 교량마다 조명이 설치됐다. 강남대로의 입체 조형물은 밤이면 꽤 빛을 발한다. 거리도 은색 수은등, 황색 나트륨등 일색에서 다양해졌다. 그래도 서울 야경의 아이콘이라 할 만한 랜드마크는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데도 서울시가 야간 도심을 더 어둡게 하겠다고 한다. 1500cd(cd는 촛불 1개 밝기)가 현재 최대치인데 최대 3분의 1가량 줄이겠다는 것이다. 빛공해 단속차원이라고 한다. 주택지역에서 수면을 방해하는 경우라면 일리도 있다. 하지만 화려·번화·수다에 때로는 약간의 과장도 멋인 상업지역의 광고판까지 끄게 하겠다면 문제다. 뉴욕 타임스스퀘어의 LG 광고판은 1만cd다. 관광서울 정책과는 거꾸로 간다. 별빛만 아늑한 부족마을을 꿈꾸나.

허원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