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서울 청담동 유씨어터에서 연극 ‘엘링’ 공연을 마친 뒤 화동연우회 회원과 배우들이 한자리에 모여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사진 뒷줄 오른쪽 일곱 번째가 양영일 회장. 김낙훈 기자
지난 4일 서울 청담동 유씨어터에서 연극 ‘엘링’ 공연을 마친 뒤 화동연우회 회원과 배우들이 한자리에 모여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사진 뒷줄 오른쪽 일곱 번째가 양영일 회장. 김낙훈 기자
‘서른 넘은 마마보이와 구제불능 숫총각 드디어 정신병원 졸업하다.’

12월4일부터 14일까지 서울 청담동 유씨어터에 올려진 연극 ‘엘링’ 포스터에 적힌 글귀다. 노르웨이 정통 코믹극인 이 작품은 소심한 성격에 대인기피증과 과대망상증을 앓고 있는 주인공 ‘엘링’이 정신병원에서 사회복지시설로 옮겨져 세상에 조금씩 적응해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연출은 경기고와 서울상대를 졸업한 뒤 연극이 좋아 대학로에서 현역 연출가로 활동하고 있는 김시번 씨가 맡았다.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린 ‘화동연우회’는 경기고 연극반 출신들의 모임이다. 경기고가 있던 곳이 서울 종로구 화동(지금의 정독도서관 자리)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협동무대를 통해 친목을 다지고 연극을 통한 문화전도사가 되자는 취지에서 결성된 연극동호인그룹이다. 회원은 현역 최고참 선배인 신구 씨를 비롯해 한진희 정한용 최용민 이근희 김성민 유태웅 김현균씨 등 전문배우와 이현우 순천향대 교수, 이수문 갤러리화이트블럭 대표, 김민기 극단학전 대표(‘아침이슬’ 작사·작곡자), 건축가 이관영 씨, 오영호 박을복자수관장 등 100명에 이른다. 연극계 원로인 고 이낙훈, 김동훈 씨도 초창기 회원이다.

현재 회장은 건설업체 다짐의 양영일 회장(전 퍼시스 부회장·66)이 맡고 있다. 회원들의 나이 차이는 무려 50년이 넘는다. 할아버지와 손자뻘 동문이 함께 모임에 참여하고 있는 셈이다. 양 회장은 “연극은 대본 배우 무대 음악효과 등이 어우러진 종합예술”이라며 “수개월간 공연을 준비하다 보면 나이 차이를 잊어버리고 조화의 미학을 깨닫는다”고 설명했다. 서울대 건축공학과 출신인 양 회장은 주로 무대장치를 맡는다.

건축가 이관영 씨(70)는 “학창시절 절반은 연극의 재미에 빠져 지냈다”며 “당시 레인메이커 미스터로버츠 등 수준 높은 공연을 준비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남학교인 경기고 재학시절 여성 역할을 맡아 인기를 끌기도 했던 이수문 대표(66)는 “연극 한 편을 무대에 올리려면 3개월 이상 대본 읽기, 연기 등 연습을 하게 되는데 마지막 2주 동안은 교내에서 합숙했다”며 “연극반 규율이 밴드부 못지않게 엄격해서 맡은 역할을 제대로 못하면 선배한테 단체로 혼쭐이 나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화동연우회는 1991년 출범 이후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셰익스피어의 ‘코리올라누스’ ‘페리클레스’, 프랑스 정통코믹극 ‘라쁘띠뜨위뜨’, 모던기법을 살린 ‘떼레즈라깽’ 등을 선보였다. 국내 초연된 작품이 많다. 이는 어려운 국내 공연 여건 때문에 기존 극단이 상업성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데 비해 화동연우회는 이 같은 제약을 받지 않고 적극적으로 새 작품의 번역과 공연에 나섰기 때문이다. 토마스 톨마노프의 ‘이것들이 레닌을?’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때로는 이 학교 출신 저명인사들이 종종 단역으로 깜짝 출연해 눈길을 끌었다. ‘볼포네’에서는 손학규 전 경기지사가, ‘코리올라누스’에서는 이석희 전 국세청 차장이 출연하기도 했다. 두 사람 역시 경기고 연극반 출신이다.

이씨는 “연극은 많은 사람이 협력해야 무대에 올릴 수 있다”며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요즘 연극은 협동심을 기르는 데 최고의 수단이자 인생을 배우는 첩경”이라고 말했다.

김낙훈 중소기업전문기자 n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