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오후 서울 대치동 포스코 본사 18층 회의실에선 포스코의 12월 정기이사회가 열렸다. 이날 상정된 안건 중에는 플랜트 부품 제조 계열사인 포스코플랜텍에 대한 3000억원 규모 유상증자 건이 있었다. 부실 자회사 지원책을 마련한 포스코가 이사회의 허가를 얻기 위한 자리였다.

하지만 7명의 사외이사 중 일부가 거세게 반발했다. 권오준 포스코 회장 등 경영진들은 이내 긴장했다. 한 사외이사는 “3000억원을 지원하면 회사(포스코플랜텍)가 정상화할 수 있다고 확신하느냐”고 따져 물었다. 자칫 ‘깨진 독에 물붓기’ 지원책 아니냐는 질책도 나왔다. 경영진은 업황 악화로 영업난을 겪고 있는 자회사 해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못했다.

오후 2시에 시작한 회의는 3시간이 지나서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는 이창희 사외이사(서울대 법대 교수)가 입을 열었다. “오늘 유상증자에 관한 안건은 보류하겠습니다. 자료를 더 보완해 검토한 뒤 회의하겠습니다.”

포스코 이사회에서 상정된 안건에 대해 보류 결정이 나온 건 2008년 12월 이후 6년 만이다. 사전에 안건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고, 실제 이사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던 관행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거수기 노릇만 하지 않고 경영진을 견제한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평가가 나온다.

◆목소리 내는 포스코 이사회

포스코그룹의 자본력을 감안하면 부실 계열사에 대한 3000억원 정도의 출자 자체가 큰 부담이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포스코 일부 사외이사는 ‘굉장히 민감한 사안’으로 받아들였다. 익명을 요구한 한 사외이사는 “포스코플랜텍은 이미 2010년부터 4년간 세 차례 유상증자를 통해 2000억원의 자금을 투입했음에도 경영난을 겪고 있는 회사”라고 설명했다. 뚜렷한 해법 없이 부실사 지원을 계속하면 포스코 평판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포스코(34.52%) 포스코건설(7.43%) 등 포스코그룹 계열사들이 41.95% 지분을 갖고 있는 포스코플랜텍은 현재 부채비율이 700%를 넘는다. 포스코 관계자는 “사외이사들은 3000억원 유상증자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 자료와 자금 투입 후 회사의 재무구조 개선 및 경영 정상화 방안 등을 요구했다”고 전했다.

포스코 이사회는 내년 1월29일 열릴 예정이다. 하지만 포스코는 포스코플랜텍의 경영난이 심각한 상황임을 고려해 연내에 임시 이사회를 열어 유상증자 안건을 처리할 예정이다.

◆포스코 경쟁력 강화 계기

포스코플랜텍의 경영 정상화를 위해선 근본적인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는 게 일부 사외이사의 판단이다. 조선 업황 악화를 고려하면 웬만한 자구책으로 회사를 살리기 어렵다는 평가다. 거슬러 올라가면 2010년 포스코가 조선·해양 플랜트 부품 제조사인 성진지오텍을 1600억원에 인수한 것 자체가 문제였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 당시 이 회사의 부채비율은 1613%에 달했다.

당시 포스코 경영진은 회사를 살리기 위해 인수금액에 맞먹는 1300억원을 투입했지만 상황은 호전되지 않았다. 지난해 7월 견실한 철강, 화공 설비 계열사 포스코플랜텍과 합병했지만 계속된 적자 누적과 부채비율 증가로 결국 지난 3월 717억원 규모의 세 번째 유상증자를 했다. 이 회사의 영업손실은 지난해 630억원, 올해는 3분기 말 기준으로 605억원을 기록했다.

포스코 관계자는 “이사회에선 추가 유상증자보다 근본적인 해법을 요구했다”며 “자산 매각과 인력 감축 등 강도 높은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왔다”고 덧붙였다. 업계에서는 포스코 이사회가 경영진의 결정에 제동을 건 게 장기적으로 포스코의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이사회가 제대로 작동하면 권 회장이 이끄는 포스코의 지배구조가 선진화될 것이란 기대도 있다.

최진석 기자 isk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