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고용보호법, 유연안전성의 걸림돌
한국 노동시장에 ‘유연안전성(flexicurity)’ 모델(본지 12월10일자 A38면 참조)을 도입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무엇일까. 해고 이후 비슷한 수준의 새 직장이 금방 생기더라도 근로자는 기존 직장의 익숙한 생활이 더 편하고 좋다. 그러나 그런 편의를 위해서 기업경영을 해칠 수는 없다. 근로자는 현재 직장을 유지하려면 해고당하지 않도록 적당히 긴장해야 한다. 유연한 노동시장은 근로자들에게 그런 긴장을 요구하는데 고용보호법제는 사실상 안일과 나태까지 보호한다.

한국 경제에서 유연안전성의 수용이 마주칠 가장 큰 걸림돌은 직장별 임금수준의 양극화일 것이다. 몇몇 대기업 근로자들의 연봉은 억대에 이르지만 대부분 근로자들의 임금은 연 수천만원 수준이다. 억대 연봉 근로자들이 수천만원 수준의 직장으로 내쫓길지도 모를 유연안전성을 받아들일까. 고임금 직장의 근로자들은 유연안전성 도입을 결사적으로 반대할 것이 분명하다.

근로자들이 요구하는 생계안전은 모든 사람들이 수긍하는 사회적 가치다. 우리 사회는 이 가치를 존중하기 때문에 고용보호법제를 채택했다. 그런데 고용보호법제의 입법 취지는 모든 근로자들의 생계안전이었지만 그 현실적 성과는 원래 취지에서 한참 벗어난다. 취업 정규직에게는 생계안전 이상을 보장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구직자들의 생계는 오히려 사각지대로 내몰기 때문이다.

고용보호법제의 시행으로 해고가 어려워진 정규직 근로자를 정리하는 데 널리 쓰는 방법이 웃돈을 얹어주는 명예퇴직이다. 까다로운 해고절차를 밟기보다는 자발적 사직을 유도하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비정규직 근로자는 웃돈을 주지 않고도 해고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차이가 임금협상에 끼치는 효과는 엄청나다.

비정규직이 높은 임금을 요구하면 금방 해고당하지만 쉽게 해고하지 못하는 정규직의 임금 인상 요구는 무시하기 어렵다. 고용보호의 효과는 정규직의 생계안전에 더해 임금협상력 강화에까지 이른다. 그 결과 강성노조가 없더라도 정규직 임금은 동일 직능 비정규직보다 더 높게 결정되기 마련이다. 기업실적이 좋으면 정규직 근로자들은 강화된 협상력을 발휘해 지급능력이 좋아진 기업으로부터 더 큰 폭의 임금인상을 쟁취해낸다.

동일 직능 동일 생산성의 근로자라도 영업 실적이 우수한 기업의 정규직 임금이 더 높은 것은 이 때문이다. 기업성과에 그만큼 기여했기 때문에 고임금이 당연하다는 주장도 있다. 이 말이 옳다면 기업성과가 나쁠 때는 정규직 근로자들이 임금삭감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최근 현대중공업 사태를 보면 별로 그런 것 같지 않다. 쌍용자동차의 위기가 경영 실패 때문인 것처럼 현대자동차의 성공도 경영의 성과다. 고용보호법제가 강화한 현대차 노조의 협상력이 기업의 성공적 경영성과에서 높은 임금인상분을 끌어냈을 뿐이다.

고용보호법제를 폐지하면 정규직의 가외 협상력은 소멸하고 임금은 일단 비정규직 수준으로 하락한다. 고용의 질이 저하한다는 비판이 거셀 것이다. 그러나 임금하락은 일차적으로 고용증가를 불러온다. 낮아진 임금수준과 노동시장의 유연성은 추가의 투자를 유치하고 그에 따라 노동수요가 더 늘어난다. 유연성이 노동시장질서로 자리 잡으면 투자는 더욱 늘어나고 노동수요도 함께 늘면서 시장 균형임금은 현행의 비정규직 임금보다는 더 높은 수준으로 결정될 것이다. 고임금 직장 근로자들의 임금은 하락하지만 임금수준 일반이 오르고 고용도 늘어나므로 고용의 전반적 질이 높아지면서 대다수 근로자들의 생계안전은 크게 개선된다.

결국 고용보호법제는 일부 고임금 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해 다른 비정규직 근로자들의 일자리를 줄이고 임금을 낮추고 있는 셈이다. 근로자 일반의 생계안전을 겨냥한 고용보호가 일부 고임금 근로자만 보호함으로써 대다수 일반 노동자들의 생계는 오히려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다. 고임금 근로자들의 저항을 제압하고 고용보호법제를 유연안전성으로 대체하는 조치가 시급하다.

이승훈 < 서울대 명예교수·경제학 shoonlee@snu.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