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주 강가에 앉아 같은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리스본의 연인들.
테주 강가에 앉아 같은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리스본의 연인들.
세상에는 두 종류의 도시가 있다. 트램이 있는 도시와 트램이 없는 도시. 땡, 땡, 종소리를 내며 느리게 트램이 다니는 도시에는 대개 과거의 흔적이 오롯하고 옛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기 마련이다. 여기에 짙은 항구 냄새까지 더해진다면 아련한 낭만을 기대해도 좋다. 빛바랜 건물 사이로 연륜이 묻어나는 트램이 오가는 리스본이라면 더욱 그렇다.

리스본의 달동네 알파마로

리스본 대성당 앞을 노란 트램이 지나간다.
리스본 대성당 앞을 노란 트램이 지나간다.
파란하늘 아래 노란 트램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다가온다. 무작정 타기만 해도 가파른 언덕을 오르고 좁은 골목을 지나 리스본의 곳곳으로 데려다 준다는 28번 트램이다. 트램에 몸을 실으니 ‘리스본에 왔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 덜컹이며 코너를 돌땐 롤러코스터처럼 아찔하다가, 좁은 골목에 들어서니 자동차 뒤에 멈춰 서 차례를 기다린다. 이 대책 없이 느린 속도는 여행의 템포도 늦춰버린다. 그저 창밖을 바라보다 마음에 드는 풍경을 만나면 그 속으로 풍덩 뛰어들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알파마로 가는 길, 양쪽으로 솟아오른 각진 종탑과 벽돌로 단단히 쌓아올린 건물이 눈길을 끈다. 원래는 무어인들이 이슬람교 모스크로 지었는데, 포르투갈인들이 가톨릭성당으로 개조했단다. 트램이 대성당 앞을 지나는 모습은 가이드북 표지로 자주 등장하는 리스본의 대표 이미지다. 타이밍만 잘 맞추면 기념품 가게에서 파는 엽서 같은 사진도 한 장 남길 수 있다.

대성당을 지나면 골목골목 미로 같은 알파마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알파마는 리스본을 이루는 일곱 개의 언덕 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있어 대지진에도 무너지지 않았다.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골목은 마치 하나하나 맛보기 전에는 그 맛을 알 수 없는 초콜릿 상자 같다. 색색의 건물들 사이로 빨래가 나부끼고, 어디선가 포르투갈 민요인 ‘파두’가 흘러나온다. 걷다 보면 빨간 지붕과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전망대가 나타나 눈을 즐겁게 해준다. 언덕 꼭대기의 상 조르제 성에 오르면 알파마부터 바이샤와 테주 강까지 리스본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리스본 알파마에서 서면 빨간 지붕과 테주강이 내려다 보인다.
리스본 알파마에서 서면 빨간 지붕과 테주강이 내려다 보인다.
바다를 향한 꿈처럼 거대한 테주 강가

28번 트램을 타고 다시 언덕을 내려오면 테주 강변과 코메르시우 광장이 맞닿은 평지가 나타난다. 코메르시우는 포르투갈어로 ‘무역’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테주 강과 연결된 광장 앞 돌계단이 한때 상인들이 오가던 무역 부두여서 얻은 이름이다. 광장 중앙에는 대지진 이후 폐허가 된 리스본을 폼발 후작과 함께 재정비하고 개혁한 호세 1세의 동상이 서있다. 동상 뒤로 과거의 영광을 조각으로 새겨놓은 개선문, 그 뒤로는 8월의 거리가 차례로 이어진다.

탁 트인 풍광이 시원스러운 테주 강은 바다처럼 넓고 거대하다. 밀물과 썰물이 있어, 서쪽 하늘로 해가 저물 무렵이면 강가에 작은 모래밭이 드러내고 아이들은 그 위를 노닌다. 강가로 모여든 리스본의 청춘들은 황금빛으로 빛나는 강물과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노을에 취한 눈빛이다.

대항해 시대의 찬란함을 간직한 벨렘지구

알파마가 리스본의 달동네라면 테주 강의 서쪽 끝 벨렘지구는 포르투갈 전성기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그만큼 볼거리도 많다. ‘테주 강의 귀부인’이라 불리는 벨렘 탑은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 세운 등대이자 요새였다. 탐험가들은 여기서 배를 타고 미지의 세계로 떠났고, 머나먼 항해에서 돌아온 이들은 여기에 내려서 왕을 알현했다. 벨렘 탑 옆에는 해양왕 엔리케 사후 500주년을 기념하는 발견 기념비가 서있다. 기념비에는 대항해 시대를 이끈 엔리케를 필두로 탐험가 바스쿠 다 가마, 서사시인 카몽이스 등 여러 인물들이 조각돼 있다. 벨렘 탑과 기념비에서는 바다 냄새보다 짙은 포르투갈인들의 자부심이 느껴진다.

그보다 더 대항해 시대의 영광이 서린 곳은 제로니무스 수도원이다. 수려한 외관 만큼 ‘마누엘 양식이 남긴 걸작’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 ‘대항해시대를 향한 러브레터’ 등 수식어도 찬란하다. 마누엘 양식이란 포르투갈 고유의 장식주의 건축양식으로, 해양 대국을 상징하는 밧줄, 닻, 해초, 산호 등 바다 관련 장식을 첨가했다.

수도원의 백미는 안뜰을 둘러싸고 있는 55m의 사각형 회랑이다. 눈길 닿는 곳마다 정교하고 화려한 장식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이번에도 느리게 회랑을 거닐어 본다. 회랑에 기대 잠시 쉬어도 본다. 희망봉을 발견하고 돌아온 바스쿠 다 가마처럼 이미 먼 길을 떠나온 사람이니까. 미지의 세계를 향해 멀리 떠나고 싶은 내 열망만큼은 그 시절 탐험가 못지않다는 생각에 슬며시 미소가 지어진다.

우지경 여행작가 travelette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