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국제시장
64년 전인 1950년 12월22일, 바람 찬 흥남부두에 눈보라가 휘날렸다. 유엔군 따라 탈출하려는 피란민들의 눈물도 함께 흩날렸다.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정원은 60명. 선장은 배에 실린 무기를 다 버리고 피란민을 태웠다. 그렇게 떠난 1만4000명이 크리스마스날 거제에 도착했다. 희생자는 한 명도 없었고, 새 생명 다섯이 배 안에서 태어났다. 기적이었다.

이 기적의 주인공들은 부산으로 몰려들었다. 무엇보다 입에 풀칠이 급했다. 신창동 일대에 좌판을 벌인 이들은 입고 있던 겉옷부터 구호물품까지 돈 되는 건 뭐든지 팔았다. 광복 직후에 생긴 귀환동포들의 노점 때문에 ‘도떼기 시장’(여러 종류의 물건을 도산매하는 무질서하고 시끌벅적한 비정상적 시장)으로 불리던 장터는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뤘다.

각지의 피란민이 모이고 미군 구호품과 군용품이 유통되자 ‘케네디 시장’과 ‘양키 시장’ ‘깡통 시장’ 등의 별칭들이 속속 등장했다. 아무 연고도 없는 이북 피란민들이 이곳에서 살아남으려면 결사적으로 덤벼야 했다. 어쩌다 작은 상권이라도 확보할라치면 견제 세력들로부터 ‘3·8따라지’(38선을 넘어온 빈털터리) 소리를 들어야 했다.

이들뿐만이 아니었다. 전국에서 모여든 문인·예술가·식자들도 이곳에서 꿀꿀이죽으로 배를 채웠다. 시인 전봉래가 쓰러졌던 시장 한 귀퉁이에서 화가 이중섭은 지게를 지고 다니며 날품을 팔았다. 고물장수나 넝마주이로 근근이 목숨을 부지하며 쌀 한 됫박만 얻어도 목이 메던 그 시절, 국제시장의 왁자한 소음은 많은 사람에게 위로와 용기를 줬다. 상거래를 넘어 문화와 예술의 교류가 그렇게 이어지던 곳이었다.

유행가 ‘굳세어라 금순아’의 애환처럼 외로움과 굶주림에 지쳐 영도다리에서 투신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런 전란의 비애 속에서도 이곳은 한때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시장으로 성장해나갔다. 이후 몇 차례 화재를 겪으면서 일반 도소매시장으로 성격은 바뀌었으나 인근 백화점, 광복동 상가들과 함께 지금도 많은 이가 찾는 부산의 명소로 손꼽힌다.

지난주 개봉된 영화 ‘국제시장’ 주인공 덕수의 삶은 굴곡진 현대사 그 자체다. 1950년 흥남철수 후 국제시장 정착, 60년대 서독 파견 광부, 70년대 베트남 파병, 80년대 이산가족 상봉 등 격변의 시대를 살아온 우리 아버지의 자화상과도 닮았다. 개봉 나흘 만에 100만명을 넘었다니, 그 지난한 역사의 고비를 넘어온 ‘눈물의 힘’이 또 다른 흥행 요소가 아닌지.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