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개발회사인 스카이랜드는 지난 8월 아파트 개발 사업비 300억원이 급히 필요했다. 금융권에 수소문하던 중 하이투자증권으로부터 “보증을 서줄 테니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을 발행해보라”는 ‘솔깃한’ 제안을 받았다. 시공사인 대우건설 보증만으로는 어음 발행이 쉽지 않을 것이란 설명이 뒤따랐다. 회사 관계자는 “보증수수료가 더 나가긴 하지만 싼 이자를 주고 개발비를 확보하는 게 급선무였던 만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고 말했다.

중형 증권사들이 부동산 개발사의 자금난을 활용한 채무보증 업무를 적극 확대하고 있다. 인수합병(M&A)이나 기업공개(IPO) 컨설팅 등 전통적 투자은행(IB)사업은 대형 증권사가 장악한 만큼 위험이 따르긴 해도 절차가 간단한 보증사업을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것이다. 신용평가회사 관계자는 “지금은 잘 못 느끼지만 앞으로 위험이 한꺼번에 터져나올 경우에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마켓인사이트] 중소형 증권사, 틈새 노리다 틈새 끼일라
3년 새 세 배로 늘어

국내 중형 증권사들의 우발채무는 2011년 3조5000억원 정도였다. 보증사업이 아니더라도 주식매매 수수료 수입이 꽤 됐던 만큼 굳이 고위험 사업에 적극적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숨은 빚’은 그러나 소리소문없이 늘더니 올해 10조원을 넘어섰다. 3년 만에 세 배로 급증한 것이다. 대형 증권사(자기자본 3조원 이상) 다섯 곳의 우발채무 잔액 3조6000억원(자기자본의 21%)보다도 훨씬 많다.

일반 증권사 중에는 우리투자증권과 합병을 앞둔 NH농협증권의 우발채무가 9월 말 현재 2조1000억원으로 가장 많다. 자기자본의 238%에 해당한다. 1조원대 ABCP 매입약정 규모를 유지하면서 조건부 CP 인수 약정 등 기타 채무보증 업무를 확대한 결과다. 하이투자증권과 교보증권도 각각 1조원이 넘는 우발채무를 보유 중이다. 자기자본의 200%에 육박한다.

종합금융업을 겸하는 메리츠종금증권은 절대 규모로 볼 때 NH농협증권보다도 많은 우발채무를 지고 있다. 9월 말 현재 3조1800억원으로 자기자본 7924억원의 402%에 달한다. 종합금융회사로서 주요 업무인 대출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담보대출확약이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담보대출확약이란 향후 어떤 조건이 발생하면 대출을 해주겠다는 약속으로,우발채무로 분류된다.

안나영 한국기업평가 책임연구원은 “시장이 침체한 상황에서 증권사들이 수익성을 유지하기 위해 갈수록 더 높은 위험 부담을 수반하는 사업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며 “중형 증권사 대부분이 신용공여 등을 통한 자문서비스에 주력하면서 우발채무가 증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고수익 틈새사업” vs “위험한 도박”

중형 증권사들이 우발채무 증가에 따른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보증 영업을 확대하는 것은 주식 위탁매매 시장에서의 수익 감소를 자문 서비스로 만회하기 위해서다. 한국기업평가에 따르면 연 5000억원 규모인 자문 수수료(보증 수수료 포함) 시장에서 중형 증권사 11곳의 점유율은 6월 말 현재 약 35%를 차지했다. 2011년 15% 수준에서 두 배 이상으로 커졌다. 보증 중심의 서비스 수익을 통해 3년 전보다 배 이상의 이익을 거두고 있는 셈이다. 한 중형 증권사 관계자는 “적립금을 쌓는 등 나름의 위험관리 시스템을 갖고 있고, 수익 확보를 위한 다른 대안이 마땅치 않아 지금으로선 포기할 수 없는 사업”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일각에선 ‘위험한 도박’이 시작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일부 증권사는 위험 관리에 대한 충분한 경험이나 이해 없이 수익 증대를 위해 우발채무를 늘리고 있다”며 “부동산 시장이 위기에 처하고 대규모 우발채무가 한꺼번에 현실화될 경우 회사 존립 자체가 위태로울 수 있다”고 경고했다.

■ 우발채무란…

지금은 채무가 아니지만 장래에 돌발 사태가 발생하면 채무로 확정될 수 있는 잠재적인 채무를 말한다. 차입보증이나 금융회사와의 약정, 소송 등이 해당되며 대부분 기업은 재무제표 각주에 우발채무를 별도 표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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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호/하헌형 기자 t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