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호 외 지음 / 글항아리 / 484쪽 / 2만6000원
그 나이대 자식을 둔 사대부 집안에선 딸의 사주와 사조(부·조부·증조부·외조부)의 성명 및 이력을 기록한 ‘처자단자(處子單子)’를 자진 신고했다. 세 번의 심사를 거쳐 3명이 추려졌다. 가문 배경과 부덕(婦德)이 선택 기준이었고, 용모와 사주도 중요했다. 이렇게 뽑힌 규수는 왕실 혼례의 마지막 단계인 친영(신랑이 신부의 집에 가서 신부를 직접 맞이하는 의식) 때까지 별궁에 머물며 왕실의 법도와 예절을 공부했다. 혼례에는 여러 달에 걸쳐 많은 인원과 의장이 동원됐다. 까다로운 절차를 거친 이들만이 왕실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졌다.
《조선의 역사를 지켜온 왕실 여성》은 조선의 왕비, 후궁, 공주, 옹주, 궁녀에 이르기까지 왕실 안에 존재했던 다양한 여성들의 생활 문화와 삶을 조명했다. 국립고궁박물관이 펴낸 여섯 번째 왕실문화 기획총서로 역사전문가 10명이 왕비의 간택과 책봉, 왕실 여성의 임신 출산 육아, 공주·옹주의 혼인과 부마, 궁녀의 생활, 수렴청정의 빛과 그늘, 왕실 여성의 재산과 경제생활, 왕실 여성과 불교, 왕실 여성의 문학, 조선 왕비·후궁의 상장례 등의 주제를 맡아 집필했다.
조선 왕비의 혼인 연령은 전기에 비해 후기로 갈수록 낮아지는 경향을 보였다. 평균 13~15세였던 혼인 나이가 현종비인 명성왕후부터 10~11세로 낮아졌다. 그럼에도 왕비의 첫 출산 나이는 조선시대 500년 동안 20세 전후로 전반적으로 높게 나타났다. 가장 어린 나이에 자녀를 출산한 왕비는 16세에 첫 아이를 낳은 혜경궁 홍씨다. 문조비 신정왕후는 11세에 세자비에 책봉됐지만 20세에 첫 아이를 낳았다.
다산의 여왕은 세종비 소헌왕후다. 소헌왕후는 18세에 초산한 뒤 20대에는 평균 1~2년 터울로 6명의 자녀를 연이어 낳았다. 그리곤 7년 뒤 31세부터 다시 임신해 40세까지 자녀 4명을 더 낳았다. 왕실 여성들은 모유수유와 양육 문제를 유모와 보모를 통해 해결했다. 대부분의 왕비들은 30대 초반이면 원자를 더 이상 낳지 않는 경향을 보였다. 노산의 위험 때문이다.
왕과 왕비를 비롯한 모든 왕실 구성원을 보필하는 역할은 궁녀가 맡았다. 그들의 의식주뿐 아니라 각종 의례까지 궁녀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궁녀 조직의 최고 권력자는 처소별 궁녀 전체를 통솔하는 제조상궁이었다. 제조상궁은 매달 당상관 이상의 월급을 받았고, 심부름하는 하녀와 옷 짓는 침모까지 배정 받았다. 왕을 보좌하는 상궁은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그 영향력이 커 정승들도 함부로 하지 못했다. 재산을 관리했던 상궁의 권한도 막강했다. 문자 교육을 받지 못한 대비들 옆에서 문서관리를 하던 궁녀들도 상당한 실세로 활동했다.
왕실 여성들은 조선의 유행을 선도했다. 왕비와 왕세자빈의 스타일은 조선시대 모든 여성들이 따라하고 싶어했던 교과서였다. 색조화장은 기생이나 궁녀 같은 특수 계층 여성에게 인기였다. 반면 궁녀를 제외한 왕실 여성들은 한 듯 안한 듯한 화장을 원했다. 백옥 같은 피부를 지닌 피부미인을 선호했다. 미인의 중요한 조건 중 하나는 검고 풍성한 머리카락이었다. 가발인 체발을 넣어 머리를 풍성하게 했으며 머리를 길게 땋아 댕기를 두른 머리인 첩지머리, 조짐머리 등으로 치장했다.
김인선 기자 indd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