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義人 현봉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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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2차대전 때 유대인 1200여명의 목숨을 구한 쉰들러. 그는 나치군에 뇌물을 주고 군수물자 생산에 꼭 필요한 인력이라는 구실로 수용소의 유대인들을 자기 공장으로 빼돌렸다.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는 당시의 모습이 드라마틱하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너무 부풀려진 것이라는 지적도 많다.
역사학자 데이비드 크로는 “쉰들러와 그 유대인 명단은 별로 관련이 없다”며 “값싼 노동력을 확보하는 것만이 그의 목적이었다”고 말했다. 쉰들러 부인도 “당시 남편의 관심은 전쟁 때문에 가동이 중단될 공장을 살리는 데만 쏠려 있었다”고 했다. 체코에서 자랄 때부터 성적증명서 위조로 퇴학당했고, 독일 스파이로 활동했으며, 나치에 입당한 전례로 봐서는 충분히 그럴 만하다. 하지만 그는 영화 덕분에 ‘선한 영웅’의 표본이 됐다.
그에 비해 흥남 철수 때 피란민 9만8000여명을 살린 6·25 영웅 현봉학(1922~2007년) 얘기는 덜 알려져 있다. ‘한국판 쉰들러’로 불리기도 하는 그의 활약은 쉰들러와 비교할 수조차 없다. 그는 함흥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함흥고보와 세브란스의전(현 연세대 의대)을 졸업하고, 미국 리치먼드의대에서 공부한 뒤 1950년 3월 귀국, 석 달 만에 6·25를 맞았다.
해병대 문관 겸 아먼드 10군 사령관의 고문으로 일하던 그는 중공군에 포위된 미군 10만5000여명의 철수작전이 펼쳐지던 흥남부두에서 아비규환을 목격했다. 영하 30도의 혹한 속에서 울부짖는 피란민들의 모습은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대부분이 공산주의에 반대해 유엔군에 협조한 사람과 기독교인들이었다. 그는 아먼드 장군을 붙들고 “저들을 살려달라”고 간청했다. 그의 눈물겨운 노력에 감동한 장군은 군수물자를 버리고 피란민을 태웠다. 이렇게 해서 배 193척에 나눠 타고 목숨을 구한 피란민은 9만8000여명. 마지막 수송선에 탄 1만4000여명은 12월25일 거제에 도착해 ‘크리스마스의 기적’ 소리를 들었다. 이 배에서 5명의 어린 생명이 태어났다.
휴전 후 다시 미국으로 간 그는 펜실베이니아의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토머스제퍼슨의대 등에서 교수로 활동하다 2007년 86세로 별세했다. 그가 올해 12월에야 국가보훈처로부터 ‘이달의 6·25전쟁 영웅’으로 선정됐다. 만시지탄이다. 모교인 연세대가 오늘 기념회를 연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를 ‘한국판 쉰들러’로 부를 수는 없다. 오히려 세계의 의인들을 ‘미국판 현봉학’ 등으로 고쳐 부르는 것이 옳지 않겠나.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역사학자 데이비드 크로는 “쉰들러와 그 유대인 명단은 별로 관련이 없다”며 “값싼 노동력을 확보하는 것만이 그의 목적이었다”고 말했다. 쉰들러 부인도 “당시 남편의 관심은 전쟁 때문에 가동이 중단될 공장을 살리는 데만 쏠려 있었다”고 했다. 체코에서 자랄 때부터 성적증명서 위조로 퇴학당했고, 독일 스파이로 활동했으며, 나치에 입당한 전례로 봐서는 충분히 그럴 만하다. 하지만 그는 영화 덕분에 ‘선한 영웅’의 표본이 됐다.
그에 비해 흥남 철수 때 피란민 9만8000여명을 살린 6·25 영웅 현봉학(1922~2007년) 얘기는 덜 알려져 있다. ‘한국판 쉰들러’로 불리기도 하는 그의 활약은 쉰들러와 비교할 수조차 없다. 그는 함흥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함흥고보와 세브란스의전(현 연세대 의대)을 졸업하고, 미국 리치먼드의대에서 공부한 뒤 1950년 3월 귀국, 석 달 만에 6·25를 맞았다.
해병대 문관 겸 아먼드 10군 사령관의 고문으로 일하던 그는 중공군에 포위된 미군 10만5000여명의 철수작전이 펼쳐지던 흥남부두에서 아비규환을 목격했다. 영하 30도의 혹한 속에서 울부짖는 피란민들의 모습은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대부분이 공산주의에 반대해 유엔군에 협조한 사람과 기독교인들이었다. 그는 아먼드 장군을 붙들고 “저들을 살려달라”고 간청했다. 그의 눈물겨운 노력에 감동한 장군은 군수물자를 버리고 피란민을 태웠다. 이렇게 해서 배 193척에 나눠 타고 목숨을 구한 피란민은 9만8000여명. 마지막 수송선에 탄 1만4000여명은 12월25일 거제에 도착해 ‘크리스마스의 기적’ 소리를 들었다. 이 배에서 5명의 어린 생명이 태어났다.
휴전 후 다시 미국으로 간 그는 펜실베이니아의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토머스제퍼슨의대 등에서 교수로 활동하다 2007년 86세로 별세했다. 그가 올해 12월에야 국가보훈처로부터 ‘이달의 6·25전쟁 영웅’으로 선정됐다. 만시지탄이다. 모교인 연세대가 오늘 기념회를 연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를 ‘한국판 쉰들러’로 부를 수는 없다. 오히려 세계의 의인들을 ‘미국판 현봉학’ 등으로 고쳐 부르는 것이 옳지 않겠나.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