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 칼럼] 공영홈쇼핑보다 시급한 일
TV 홈쇼핑 업체에 상품을 대는 납품업자(벤더) K씨는 6년 전 L홈쇼핑과의 거래에서 낭패를 본 뒤 아직도 빚더미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과장급 상품기획자(MD) A씨와 한 구두계약을 철석같이 믿은 게 화근이었다. 방송을 1주일 앞두고 A씨의 상사인 부장급 MD B씨가 갑자기 벤더를 바꿔버렸다. K씨는 준비한 5억원어치 건강보조식품을 ‘땡처리’해 3000만원을 건졌다.

와신상담하던 K씨는 최근 식품류 상담을 위해 L홈쇼핑을 다시 찾았다. 상담실에 나타난 MD 두 명은 잡담만 늘어놓다 2분 만에 일어섰다. 상사의 지시탓에 마지못해 상담에 응했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B씨를 비롯 당시 대표이사 S씨와 S전무 등 10여명이 올해 구속되는 사태를 겪었지만 L홈쇼핑의 기업문화는 바뀔 기미가 없다는 게 벤더들의 전언이다.

승인제가 홈쇼핑시장 왜곡

홈쇼핑업체 MD의 ‘갑질’이 다반사로 일어날 수 있는 근본 원인은 ‘홈쇼핑TV 승인제’다. 승인제로 말미암아 자유경쟁은 원천 봉쇄되고 과점체제가 자리 잡았다. 홈쇼핑업체가 소화해주는 상품량은 전체 중소기업이 원하는 수요의 5%에 불과하다는 게 중소기업계의 하소연이다. 수요자는 넘쳐나는데 공급자는 여섯 군데로 한정돼 있으니 벤더 입장에선 MD가 ‘신과 동일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홈쇼핑사업자 선정의 명분은 언제나 똑같다. ‘중소기업의 판로 확대’다. 홈쇼핑이 탄생하던 1995년 김영삼 정부 때도, 2차 홈쇼핑업체를 선정하던 2001년 김대중 정부 때도, 중소기업 전용 홈쇼핑을 설립한 이명박 정부 때도 명분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중소기업들은 항상 배고프다고 아우성이다. 정부는 내년에 공영홈쇼핑을 신설하겠다고 공언했다. 기존 홈쇼핑업체들이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 정부가 직접 나서게 됐다는 논리다. 하지만 공영홈쇼핑 하나로 왜곡된 시장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진입 장벽 없애고 연번제 채택을

납품업체를 울리는 불공정거래, 과도한 판매수수료, 충동구매 등 폐단을 근본적으로 없애는 유일한 길은 승인제를 등록제로 바꾸는 것이다. 미국 일본 등 대부분의 선진국들이 취한 방식이 바로 이것이다. 1980년대까지 수십개의 홈쇼핑업체가 경쟁을 벌이던 미국은 1990년대 이후 QVC와 HSN 두 업체가 총 8조원 시장의 90%를 차지하는 양강구도로 정착됐다. 일본도 1990년대부터 쇼핑 전문채널을 비롯 방송위성(BS), 통신위성(CS), 공중파 등 수십개 업체들이 홈쇼핑 프로그램을 내보내고 있다. 영국은 30번대 이후 채널에 총 40개 채널이 배치돼 홈쇼핑 방송을 하고 있다. 특정 채널대에 홈쇼핑을 집중 배치하는 연번제다.

영국 같은 연번제는 모든 시청자들을 상업적 메시지에 노출시키는 폐단을 막을 수 있다는 게 방송학자들의 주장이다. 공중파 사이 S급 채널을 따내기 위해 들어가는 홈쇼핑 6개사의 송출수수료가 올해 1조1000억원에 달할 전망(온라인쇼핑협회)이다. 판매수수료가 평균 34%에 이르는 것도 지나친 송출료가 큰 몫을 차지한다. 연번제는 송출료 부담을 줄이는 강력한 무기다.

정부는 2001년 4월 제2차 홈쇼핑사업자를 선정하면서 ‘장기적으로 진입장벽을 없애고 누구나 자유롭게 홈쇼핑 채널 사업자가 될 수 있게 하는 것이 홈쇼핑 방송정책의 기본방침’이라고 밝힌 적이 있다. 초심으로 돌아갈 때다.

강창동 유통전문기자·경제학博 cd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