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첫 도전 후 마침내 올 하반기 농협은행(5급)에 합격해 지난 22일부터 연수를 받고 있는 임종근 씨(29)는 “일상에서 습득한 정보와 사소한 팁들이 ‘불합격 멘붕’을 이긴 힘이 됐다”고 말했다.
# “‘큰딸, 아빠는 널 믿는다.’ 부모님의 이런 산 같은 믿음이 언행으로 고스란히 전달됐기에 그 믿음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조차 자신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결과보다 과정과 노력을 더 칭찬해주신 부모님 덕분에 어떤 상황에서도 일희일비하지 않는 마인드를 갖게 됐어요.”
중국 베이징대 역사학과를 나와 지난해 롯데백화점 인턴을 거쳐 올 7월 신입사원이 된 한성원 씨(24)는 “중3인 딸이 아무 연고도 없는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고 싶어 했을 때도 어린 딸의 모험을 지지해주신 부모님의 사랑과 믿음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전했다. 입사 경쟁률 100 대 1의 시대. 입사과정에서 수많은 좌절을 겪으면서도 오뚝이처럼 일어서고, 입사 후에도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고 있는 이들은 어떤 ‘내면의 힘’이 있었을까. 많은 인사담당자는 “힘든 입사과정을 겪어내고 들어온 이들이 입사 후 더 높은 성과를 내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취업 펀더멘털’이 탄탄했다는 것이다. 불합격 통보 앞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툭툭 먼지를 털어내듯 일어나고, 보통 사람이라면 주저앉아 버릴 상황에서도 긍정과 도전정신으로 세상을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 이들이었다.
올해 한국경제신문 JOB면을 통해 만났던 이들 가운데 특히 ‘취업 펀더멘털’이 강한 이들을 소개한다. 이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열악한 환경을 딛고, 보이지 않는 자신만의 비전을 좇아 반드시 꿈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지닌 공통점이 있었다. 취업을 하고 꿈을 이루는 데는 정해진 길이 없었다.
“남과 더불어 살 수 있는 사회 만들겠다”
취업근육이 탄탄한 이들에게는 ‘더불어 함께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는 높은 꿈이 있었다. 한국수출입은행 대외협력기금(EDCF) 분야에서 일하는 강민혁 씨는 자신보다 남과 이웃을 위해 20대를 보냈다. 대학시절 평일 수업 후엔 보육원을 찾아 사춘기 중·고등학생들의 형 노릇을 자청했으며, 주말엔 서울역 노숙인들의 자립을 돕기 위해 봉사에 나섰다.
심지어 졸업 후에도 눈앞의 취업보다 국제난민 비정부기구(NGO)에서 1년간 일하면서 미래를 준비했다. 강씨는 “주위의 어려운 이들에게 사회·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야말로 내가 가야 할 길이라는 것을 봉사를 통해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의 꿈은 아프리카인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국내 최고의 아프리카 개발협력 전문가’다.
임종근 씨도 “아프리카 카메룬에서 현지인들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살아난 이후 ‘내 목숨은 내 것이 아니다’는 생각으로 살게 됐다”며 “앞으로 한국 농업의 지속 가능한 발전과 한국 및 세계 협동조합사에 한 획을 긋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강조했다.
직장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도 직업관이 남달랐다. 토목공학도인 최요셉 씨(이랜드 입사)는 고액연봉을 주는 여러 곳에 합격했지만, 돈보다 함께 성장할 수 있는 회사를 선택했다. 최씨는 “입사를 앞두고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인가, 나와 회사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곳인가, 평생 일할 수 있는 곳인가’가 직장 선택의 기준이었다”고 설명했다. 임씨도 “취업을 목표로 삼기보다 궁극적인 ‘꿈’을 위해 간절히 준비했기에 입사가 가능했다”고 말했다.
흔들릴 때마다 자신을 붙잡아준 ‘좌우명’이 있었던 것도 공통점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를 좌우명으로 삼은 한성원 씨는 “겨울이 가면 봄이 오듯 시련 뒤엔 기쁨이 온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역경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전했다. 학생군사교육단(ROTC) 출신인 최씨는 스스로를 ‘절지남(절대 지치지 않는 남자)’으로 부르며 지칠 때마다 자신을 붙들었다. 임씨는 경영서적 《멀티플레이어》를 읽으면서 참된 리더는 팀원들의 역량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도록 돕는 사람임을 깨닫고 언젠가 그런 리더가 될 날을 꿈꿨다고 말했다.
‘긍정적 사고·도전정신’이 최고 자산
평소 가정교육도 이들의 직업관을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돈을 못 벌어도 좋으니 사람이 되라는 말씀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는 임씨는 밖에서 버릇없이 행동하면 집에 와서 아버지께 호되게 혼났다고 털어놨다. “그 엄한 ‘아버지의 매’ 때문에 어딜 가도 어떻게 행동해야 하고,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됐어요. 이런 문제의식이 다양한 활동 속에서 리더가 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강씨는 ‘부모님의 믿음’이 오늘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얘기했다. “기대치는 있었지만 강요는 하지 않으셨죠. 졸업 후 취업보다 해외봉사를 떠날 때도 지지해 주고 믿어주셨습니다.” 강씨는 대학입학 후부터 ‘내 용돈은 내가 번다’는 생각으로 부모님의 경제적 지원을 받지 않은 것이 독립심을 키운 비결이라고 털어놨다.
흔히 은행권에 입사하려면 부모님이 중산층 전문직에 종사하고 일정 규모의 거래가 있어야 한다는 풍문도 있지만, 임씨는 “3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농협은행은 주거래은행도 아니었다”며 “부족한 환경 속에서 스스로 노력을 통해 ‘명문 가문’을 이뤄보겠다는 긍정적 사고와 도전정신이 합격을 위한 최고의 자산이었다”고 설명했다.
‘취업 펀더멘털’이 튼튼한 이들은 입사 후 더 큰 역할을 맡고 있었다. 한씨는 “7년간의 ‘나홀로’ 중국 유학이 입사 후 더 튼튼하게 설 수 있도록 만든 약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 고객의 칭찬 글로 인해 우수사원으로 선정됐을 뿐 아니라 사내 영상공모전 수상, 온라인몰 제작 등을 통해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하고 있다. 패션 매니저로 시작한 최씨는 아동복을 거쳐 백화점과 아울렛에서도 역량을 인정받고 있다. 강씨는 “수출입은행 아프리카팀과 손발을 맞춰 모잠비크 병원 건축, 구급·소방차 공급 등의 성과를 거뒀다”고 소개했다.
공태윤 기자 true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