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자기파괴 충동이 지배했던 2014년,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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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년이 저물어간다. 돌이켜보면 유독 사건사고가 많았다. 더 참담한 사실은 사회의 중심을 잡아야 할 중추구조 집단들이 보여준 적나라한 민낯이다. 무소불위의 입법 독재로 치닫는 정치, 법치에서 점점 멀어지는 법조, 스스로 찌라시로 전락해가는 언론…. 본분을 망각한 심각한 자기파괴 충동이다. 갈등의 중재자가 돼야 할 집단들이 거꾸로 갈등을 생산하고 증폭시켰다. 정치가 진영논리에 중독되고, 법조에 저질 정치가 스며들며, 언론이 찌라시화하는 나라에 미래가 있을 것인가. 한국 문제군(群)은 해소될 것인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제 갈림길이 다가오고 있다.
1. 한국 문제군(群)의 본질 '입법독재' 정치
민주주의는 상처받고 있다. 다수결조차 부정하는 국회선진화법으로 국회는 확실히 후진화를 이뤄냈다. 365일 정쟁으로 지새우면서도 국회의원 특권 고수에는 여야가 한몸이었다. 지난 총선·대선 때 사탕발림으로 약속한 무차별 공짜복지가 파탄났어도 누구 하나 사과도 없다. 그러고도 한술 더 떠 ‘신혼부부 집 한 채’소동까지 일어났다.
국회는 불량 법률을 찍어내는 입법공장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19대 국회에서 의원발의 입법안은 2년 반 새 1만1935건이다. 올해만 3950건이다. 18대 국회 4년간 발의건수(1만2220건)에 거의 맞먹는다. 대량 입법의 신기록 수립은 시간문제다. 법안 내용을 들여다보면 한심하다 못해 참담하다. ‘여자’를 ‘여성’으로 바꾸는 단순 자구수정까지 발의건수로 쳐주고 많이 발의할수록 우수의원이 되는 게 현실이다.
희한한 점은 국회가 열심히 일할수록 무법천지가 된다는 점이다. 이런 모순은 누군가의 권리를 제약하고, 시장을 부정하고, 특정집단에 특혜를 주는 반시장적 법률을 쏟아낸 결과다. 단통법 사례처럼 ‘그랬으면 좋겠다’는 희망사항을 법으로 만들어 강제하고 있다. 문제의 본질을 파악할 능력도, 의지도 없이 그저 목적사항만 나열하고 있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정치가 못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이른바 입법독재의 시대다. 국정을 감사한다면서 민간 기업인을 마음대로 불러댄다. 쪽지예산, 카톡예산을 들이밀고 입법로비, 청부입법도 마다하지 않는다. 부동산 3법은 시장이 다 죽은 뒤에야 통과시켰고 서비스업 규제 완화 법안은 기억이 가물거릴 정도다. 무소불위 정치의 실체는 “내가 누군지 알아”라는 한마디에 함축돼 드러났다.
그런 특권의식에 똬리를 튼 ‘갑질’ 본능이 한국 정치를 휘감고 있다. 그러고도 여야 정치권은 입법권력의 극대화를 위해 개헌을 추구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는다. 국회 독재가 활짝 열리는 셈이다. 정치가 한국 문제군의 본질이다.
2. 법치주의에서 점점 멀어져간 제멋대로 사법부
사법부도 헌법수호와 법치주의 확립이라는 본연의 의무를 충실히 못 한 한 해였다. 무엇보다 법정의 독립과 양심의 자유를 팽개친 제멋대로 판결이 줄을 이었다. 통상임금 판결들은 사업장을 혼돈으로 밀어넣었다. 십수건의 관련 판결은 판사에 따라 제각각이었다. 대법원에서 겨우 바로잡히긴 했지만 쌍용자동차 정리해고에 대한 서울고법 판결도 기업경영의 ABC를 부정하는 판단이었다.
더 큰 문제는 자유민주주의라는 헌법적 가치에 대한 일부 판사들의 편향된 시각이다. ‘종북’이란 단어를 사실상 금지어로 만들어 버린, 정치평론가 변모 씨에 대한 유죄판결이 대표적인 사례다. 종북은 이미 보편화된 용어였지만 법원은 거꾸로 갔다. 도심도로 점거 시위에 대해 무죄판결을 내린 판사도 있었다. 소위 ‘원세훈 무죄 판결’에 대한 공개비판으로 정직 2개월의 중징계를 받은 김모 부장판사의 경우는 정치에 찌든 법관의 품위를 잘 보여주었다.
채동욱 전 검찰총장부터가 정치적 편향논란을 불렀다. 호위무사를 자처하는 검사가 나올 지경이었다. 법원이 포퓰리즘 논란에 휩싸였고, 검찰은 구태 정치바람을 탔다. 재야 법조라는 변호사들도 법률가적 행동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전관 변호사들의 높은 수임료는 국민을 놀라게 했다. 귀족 판·검사들의 전관예우 실태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변호사회는 공적 책임은 팽개친 채 오로지 변호사 업무를 개척하기 위한 로비에만 몰두한다는 비판도 받았다.
법조계부터 법치와 헌법의 가치를 소홀히 한 한 해였다. 그러면서 판사들조차 국회 앞에만 서면 쩔쩔매는 듯한 현상도 나타났다. 인사청문회 등을 의식한 행동일 테지만 삼권분립의 법체계가 흔들릴 지경까지 왔다. 법조가 썩어버리면 무엇으로 나라를 바로잡을 것인가.
3. 세월호…문창극…찌라시…음모를 퍼날랐던 황색 언론
세월호 참사 와중에 미확인 보도가 봇물을 이뤘다. 재난보도의 기본은 지켜지지도 않았다. 언론 스스로가 재난구조 지휘부라도 되는 듯 춤을 추었다. 유족들은 슬픔에서 빠져나올 수조차 없었다. 결국 사회 전체를 비극적 사건의 인질로 만들고야 말았다. 그게 소위 종편과 공중파를 위시한 한국 언론이 한 일이다. 근접 촬영에, 심지어 피해자 인터뷰에 이르기까지 곳곳에서 카메라의 폭력이 넘쳤다. TV화면은 대참사 현장조차 단지 시청률에 연결시키는 소재로 삼은 게 아닌가 할 정도였다. KBS는 문창극 총리 후보자를 검증한다면서 앞뒤를 잘라낸 조작 편집으로 마치 문 후보가 민족비하 발언을 한 것처럼 왜곡 보도했다. 비판이 쏟아졌지만 공영방송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악법도 법이다’는 말이 한국 언론에서는 “소크라테스 악법 옹호 파장”으로 둔갑한다는 냉소, ‘내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말은 “이순신, 사건 은폐 지시”로 둔갑한다는 조롱이 단지 풍자만이 아니었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정치과잉 사회의 극단논리까지 언론에서 한 축을 맡곤 했다. 선정성에도 매몰됐다. 그런 보도 경향은 갈수록 심해진다는 비판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 찌라시 사건도 그랬다. 청와대 실무자들의 작은 권력다툼이 모든 국정 과제를 압도해 버렸다. 음모론적 프레임만 씌울 수 있으면 침소봉대 왜곡보도를 불사했다.
언론은 자유의 산물이다. 하지만 자유의 유사품인 방종은 무지를 정당화할 뿐이다. 그렇게 되면 독자만이 아니라 언론 자신도 피해자가 된다. 황색 저널리즘은 지금도 그렇게 경쟁하고 있다. 한국 사회 전체가 막장드라마와 찌라시에 몰입하면서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다. 언론은 참담한 무지가 지배한 한 해였다.
1. 한국 문제군(群)의 본질 '입법독재' 정치
민주주의는 상처받고 있다. 다수결조차 부정하는 국회선진화법으로 국회는 확실히 후진화를 이뤄냈다. 365일 정쟁으로 지새우면서도 국회의원 특권 고수에는 여야가 한몸이었다. 지난 총선·대선 때 사탕발림으로 약속한 무차별 공짜복지가 파탄났어도 누구 하나 사과도 없다. 그러고도 한술 더 떠 ‘신혼부부 집 한 채’소동까지 일어났다.
국회는 불량 법률을 찍어내는 입법공장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19대 국회에서 의원발의 입법안은 2년 반 새 1만1935건이다. 올해만 3950건이다. 18대 국회 4년간 발의건수(1만2220건)에 거의 맞먹는다. 대량 입법의 신기록 수립은 시간문제다. 법안 내용을 들여다보면 한심하다 못해 참담하다. ‘여자’를 ‘여성’으로 바꾸는 단순 자구수정까지 발의건수로 쳐주고 많이 발의할수록 우수의원이 되는 게 현실이다.
희한한 점은 국회가 열심히 일할수록 무법천지가 된다는 점이다. 이런 모순은 누군가의 권리를 제약하고, 시장을 부정하고, 특정집단에 특혜를 주는 반시장적 법률을 쏟아낸 결과다. 단통법 사례처럼 ‘그랬으면 좋겠다’는 희망사항을 법으로 만들어 강제하고 있다. 문제의 본질을 파악할 능력도, 의지도 없이 그저 목적사항만 나열하고 있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정치가 못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이른바 입법독재의 시대다. 국정을 감사한다면서 민간 기업인을 마음대로 불러댄다. 쪽지예산, 카톡예산을 들이밀고 입법로비, 청부입법도 마다하지 않는다. 부동산 3법은 시장이 다 죽은 뒤에야 통과시켰고 서비스업 규제 완화 법안은 기억이 가물거릴 정도다. 무소불위 정치의 실체는 “내가 누군지 알아”라는 한마디에 함축돼 드러났다.
그런 특권의식에 똬리를 튼 ‘갑질’ 본능이 한국 정치를 휘감고 있다. 그러고도 여야 정치권은 입법권력의 극대화를 위해 개헌을 추구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는다. 국회 독재가 활짝 열리는 셈이다. 정치가 한국 문제군의 본질이다.
2. 법치주의에서 점점 멀어져간 제멋대로 사법부
사법부도 헌법수호와 법치주의 확립이라는 본연의 의무를 충실히 못 한 한 해였다. 무엇보다 법정의 독립과 양심의 자유를 팽개친 제멋대로 판결이 줄을 이었다. 통상임금 판결들은 사업장을 혼돈으로 밀어넣었다. 십수건의 관련 판결은 판사에 따라 제각각이었다. 대법원에서 겨우 바로잡히긴 했지만 쌍용자동차 정리해고에 대한 서울고법 판결도 기업경영의 ABC를 부정하는 판단이었다.
더 큰 문제는 자유민주주의라는 헌법적 가치에 대한 일부 판사들의 편향된 시각이다. ‘종북’이란 단어를 사실상 금지어로 만들어 버린, 정치평론가 변모 씨에 대한 유죄판결이 대표적인 사례다. 종북은 이미 보편화된 용어였지만 법원은 거꾸로 갔다. 도심도로 점거 시위에 대해 무죄판결을 내린 판사도 있었다. 소위 ‘원세훈 무죄 판결’에 대한 공개비판으로 정직 2개월의 중징계를 받은 김모 부장판사의 경우는 정치에 찌든 법관의 품위를 잘 보여주었다.
채동욱 전 검찰총장부터가 정치적 편향논란을 불렀다. 호위무사를 자처하는 검사가 나올 지경이었다. 법원이 포퓰리즘 논란에 휩싸였고, 검찰은 구태 정치바람을 탔다. 재야 법조라는 변호사들도 법률가적 행동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전관 변호사들의 높은 수임료는 국민을 놀라게 했다. 귀족 판·검사들의 전관예우 실태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변호사회는 공적 책임은 팽개친 채 오로지 변호사 업무를 개척하기 위한 로비에만 몰두한다는 비판도 받았다.
법조계부터 법치와 헌법의 가치를 소홀히 한 한 해였다. 그러면서 판사들조차 국회 앞에만 서면 쩔쩔매는 듯한 현상도 나타났다. 인사청문회 등을 의식한 행동일 테지만 삼권분립의 법체계가 흔들릴 지경까지 왔다. 법조가 썩어버리면 무엇으로 나라를 바로잡을 것인가.
3. 세월호…문창극…찌라시…음모를 퍼날랐던 황색 언론
세월호 참사 와중에 미확인 보도가 봇물을 이뤘다. 재난보도의 기본은 지켜지지도 않았다. 언론 스스로가 재난구조 지휘부라도 되는 듯 춤을 추었다. 유족들은 슬픔에서 빠져나올 수조차 없었다. 결국 사회 전체를 비극적 사건의 인질로 만들고야 말았다. 그게 소위 종편과 공중파를 위시한 한국 언론이 한 일이다. 근접 촬영에, 심지어 피해자 인터뷰에 이르기까지 곳곳에서 카메라의 폭력이 넘쳤다. TV화면은 대참사 현장조차 단지 시청률에 연결시키는 소재로 삼은 게 아닌가 할 정도였다. KBS는 문창극 총리 후보자를 검증한다면서 앞뒤를 잘라낸 조작 편집으로 마치 문 후보가 민족비하 발언을 한 것처럼 왜곡 보도했다. 비판이 쏟아졌지만 공영방송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악법도 법이다’는 말이 한국 언론에서는 “소크라테스 악법 옹호 파장”으로 둔갑한다는 냉소, ‘내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말은 “이순신, 사건 은폐 지시”로 둔갑한다는 조롱이 단지 풍자만이 아니었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정치과잉 사회의 극단논리까지 언론에서 한 축을 맡곤 했다. 선정성에도 매몰됐다. 그런 보도 경향은 갈수록 심해진다는 비판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 찌라시 사건도 그랬다. 청와대 실무자들의 작은 권력다툼이 모든 국정 과제를 압도해 버렸다. 음모론적 프레임만 씌울 수 있으면 침소봉대 왜곡보도를 불사했다.
언론은 자유의 산물이다. 하지만 자유의 유사품인 방종은 무지를 정당화할 뿐이다. 그렇게 되면 독자만이 아니라 언론 자신도 피해자가 된다. 황색 저널리즘은 지금도 그렇게 경쟁하고 있다. 한국 사회 전체가 막장드라마와 찌라시에 몰입하면서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다. 언론은 참담한 무지가 지배한 한 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