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단골 술집으로 유명한 쿠바 아바나의 ‘플로리디타’. 외국인 관광객들이 헤밍웨이가 즐겨 마셨던 칵테일 ‘모히토’를 맛보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장진모 특파원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단골 술집으로 유명한 쿠바 아바나의 ‘플로리디타’. 외국인 관광객들이 헤밍웨이가 즐겨 마셨던 칵테일 ‘모히토’를 맛보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장진모 특파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쿠바와 국교 정상화를 추진하겠다고 발표한 지 2주 뒤인 지난해 12월30일 0시30분 쿠바 수도 아바나의 멜리아코히바호텔. 체크인을 위해 신용카드를 내밀자 호텔 직원은 “아메리칸익스프레스카드와 씨티카드는 안 된다”고 했다. 기자가 체이스비자카드, 우리아메리카비자카드를 차례로 건넸지만 모두 결제승인이 거부됐다. 어쩔 수 없이 20%나 되는 환전수수료를 부담하며 현금으로 선결제를 했다. 아바나에서의 첫날은 이렇게 미국의 대(對)쿠바 제재가 여전함을 체험하며 시작됐다.

관광대국 쿠바의 잠재력

[글로벌 컨트리 리포트] 쿠바 자영업자 이미 '시장경제 마인드'…美 신용카드는 아직 못 써
이날 오전 1800년대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유적이 남아 있어 아바나의 관광 1번지로 불리는 올드아바나거리. 캐나다 프랑스 노르웨이 러시아 폴란드 브라질 등에서 온 관광객으로 붐볐다.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암스테르담과 파나마시티를 거쳐 꼬박 24시간 만에 도착했다는 젊은 직장인 루시 엘리자베스는 “미국과 수교하면 미국 관광객이 많이 몰릴 것 같아 서둘러 왔다”며 “2주간의 겨울 휴가를 쿠바에서 보낼 예정”이라고 말했다. 상점이 몰려 있는 비숍거리는 서울 명동처럼 어깨를 부딪히며 걸어야 했다. 거리 곳곳에선 쿠바 명물인 미국산 ‘빈티지 카’가 눈길을 끌었다. 1961년 미국이 금수조치를 취하기 전까지 아바나를 달리던 고급 세단이 반세기 이상 사회주의 체제를 거쳐 ‘빈티지 택시’로 바뀐 것이다. 1958년산 캐딜락으로 택시 영업을 하고 있는 리카르도 가르시아는 “경제가 어렵지만 미국의 금수조치가 풀리면 좋아질 것”이라고 손을 치켜올렸다.

아바나 중심에서 남쪽으로 차를 타고 30분 거리에 있는 어니스트 헤밍웨이 하우스. 헤밍웨이가 7년간 머물면서 ‘노인과 바다’를 집필한 농장이 딸린 저택이다. 미 정부의 허가를 받고 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미국인 관광객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아바나는 혁명 이전 ‘하와이(자연경관) 라스베이거스(카지노·매춘) 파리(역사)’가 혼합된 도시로 불릴 정도로 중남미 최고의 관광·휴양도시였다.

쿠바 국영TV방송은 지난해 쿠바를 찾은 외국 관광객이 300만명으로 전년보다 5.3% 늘었다고 최근 보도했다. 25억달러의 관광수입은 서비스 수출(의사 교사), 해외 친척 송금에 이은 세 번째 외화 획득 사업이다. 멜리아코히바호텔에서 수영장을 관리하고 있는 프랑스인 마르조 오키토는 “아바나는 중남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마피아 갱단과 마약, 폭력이 없는 곳”이라며 “미국이 여행 금지를 풀면 관광산업이 급팽창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낡은 사회주의의 그늘

아바나의 속은 겉모습과 달랐다. 사회주의의 그늘이 깊게 드리워져 있었다. 저녁식사를 위해 찾은 한 중식당엔 테이블의 3분의 2가 비어 있었다. 화장실 물도 거의 나오지 않았다. 현지 가이드는 “국영식당이라 종업원도 정부에서 월급을 받는 공무원”이라고 귀띔했다. 손님이 오지 않아도 월급은 줄지 않는다고 했다. 반면 여행정보 사이트 트립어드바이저에 소개된 이탈리안 레스토랑 ‘라카사’는 30분을 기다릴 정도로 손님이 붐볐다.

쿠바 정부는 1990년대 후반부터 일부 자영업을 제한적으로 허가했지만 모든 호텔, 식당의 80%가량은 아직 국영이다. 근로자 500만명(총인구 1100만명) 가운데 44만명 정도만 민간 분야에서 일하고 나머지는 공무원이다. 의료·교육이 무상이며 주택과 식량·전기 등도 거의 무상 공급된다. 쿠바 공군 대위로 예편한 한국계 3세 안토니오 김 할아버지는 “차별은 없지만 배급이나 월급이 너무 적은 게 국민의 불만”이라고 말했다.

2008년 형 피델로부터 권력을 물려받은 라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 겸 대통령은 2010년부터 시장경제 요소를 도입하는 등 개혁개방에 나섰다. 자영업 허가를 확대하고 부동산과 차량 매매를 허용했다. 자동차 수입 금지와 여행 허가제도 폐지했다. 하지만 경제는 여전히 빈사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최대 후원국인 러시아와 베네수엘라가 지난해 유가 급락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쿠바 경제도 영향을 받았다. 미라마르무역센터빌딩엔 100개 이상의 외국 기업이 입주해 있지만 정부의 각종 규제에 발이 묶여 본격 투자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경제성장률은 1.4%(추정)에 불과하다. 롤란드 스와레스 전 아바나대 법학과 교수는 “정부의 개혁개방 정책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성공하려면 국민에게 열심히 일하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고 노력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마인드를 심어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싹트는 시장경제 희망

경제 전체로 보면 미미하지만 식당 택시 이발소 등 자영업에선 시장경제가 싹트고 있었다. 알레한드로 로바니아 라카사 사장은 “많은 쿠바인이 내일보다 오늘을 더 중요하게 여겨 열심히 일하지 않지만 우리 같은 식당 주인들은 마케팅까지 할 정도로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고 말했다. 1995년 부모님이 시작한 식당을 물려받았다는 그는 “20년을 기다려왔다”며 “쿠바는 바위 속의 다이아몬드다. 미국이 쿠바에 투자하면 다이아몬드의 진가가 발휘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미 국무부는 1월 중 국교 정상화 협상단을 쿠바에 파견할 예정이다. 아바나 미 대사관 설치, 미 신용카드의 쿠바 사용 허용, 이민 문제 등을 논의한다. 외교 소식통들은 오바마 대통령과 카스트로 의장이 오는 4월 파나마에서 열리는 ‘아메리카 서밋(아메리카대륙 국가 정상회의)’에서 만나 국교 정상화에 관한 획기적인 조치를 내놓을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게리 후프바우어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미국과의 국교 정상화가 침체된 쿠바 경제를 살리는 촉진제가 될 것”이라며 “관광과 해양 유전 개발, 시가를 비롯한 농업 분야에 외국인 투자자금이 몰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스와레스 전 교수는 “쿠바는 외국인이 투자할 만한 잠재력을 충분히 갖고 있다”면서도 “쿠바 정부가 핵심 경제 분야는 국유화 기조를 유지할 것으로 예상돼 1~2년 이내에 큰 성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아바나=장진모 특파원 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