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주요 대기업들은 여유 자금이 생기더라도 투자보다는 빚부터 갚을 생각이라고 한다. 한경 마켓인사이트가 삼성전자 현대차 등 국내 주요 대기업 CFO 26명을 대상으로 새해 재무전략에 대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다. 잉여 현금이 발생할 경우 가장 우선할 업무를 묻는 질문에 ‘차입금 상환(또는 차환)’이라는 응답이 38%로 가장 많았다. ‘설비투자 확대’는 19%로 차입금 상환의 절반에 그쳤다. 대내외 불확실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는 만큼 재무전략을 매우 보수적으로 짜고 있다는 얘기다.

올해 기업 여건은 여느 때보다 어렵다. 미국을 제외한 글로벌 경기가 침체일로인 데다 내수도 여전히 부진한 상황이다. 저유가는 반갑지만 러시아 등 산유국 중 일부가 디폴트라도 난다면 글로벌 시장은 또 한 차례 휘청거릴 수 있다. 지속적인 엔저도 부담이다. 그런 점에서 기업들이 방어적 전략을 세우고 있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문제는 기업이 잔뜩 움츠러든 것이 대내외 경제여건 때문만은 아니라는 데 있다. 새해부터 적용되는 사내유보금 과세나 온실가스배출권 거래제와 같은 각종 규제들은 가뜩이나 어려운 기업의 운신 폭을 더욱 좁게 만들고 있다. 특히 기업 간 인수합병이나 해외투자를 ‘투자’로 보지 않고 유보금 과세에 포함하기로 한 것은 투자 축소에 결정적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유보금 과세로 10대 그룹이 추가로 내야 할 세금만 1조800억원가량이 될 것이라 한다.

정부가 투자의욕을 북돋아도 모자랄 판에 이런저런 규제로 발목을 잡고 있으니 돈이 있어도 투자보다는 빚부터 갚겠다는 것이다. 상황이 이런데 대통령과 부총리가 경기를 살리겠다, 혹은 개혁이 필요하다고 아무리 외쳐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경기를 살리는 주체는 정치인도 관료도 아닌, 기업이다. 정부는 기업들이 마음껏 뛸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기만 하면 된다. 올해 경제민주화법들이 풀가동되는 것은 분명 장애요인이지만 규제 법을 운용하는 것도 정부 하기 나름이다. 기업이 뛸 수 있도록 여건을 갖춰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