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미국경제학회의 '소프트파워'
미국경제학회 연례총회는 매년 1월 첫째 주 금요일에 열린다. 올해는 보스턴에서 열렸다. 참가비는 1인당 55달러다. 등록을 마치면 400쪽이 넘는 두툼한 책자 한 권을 건네준다. 사흘 동안 열리는 500개의 논문 요약이 주제 발표자 명단과 함께 조그만 활자로 빼곡히 적혀 있다. 이를 위해 초특급호텔 세 곳과 대형 컨벤션센터 전시장을 쪼개 만든 각종 회의실 수십 곳이 총동원된다. 발표시간은 1인당 20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도 예외가 없다.

지난해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장 티롤 프랑스 툴루즈1대학 교수는 총회 기간 내내 하루도 쉬지 않고 네 개의 세션에서 자신의 논문을 발표했다. 미시경제학자인 탓에 언론의 조명을 못받고, 발표시간에 쫓겨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오찬에도 빠져야 했다. 발표 장소도 40명이 간신히 들어가는 비좁은 회의실을 배정받았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대가들이 학부생들 틈에 끼여 후학들의 발표를 듣고 손을 들어 질문하는 모습도 흔한 풍경이다. 유엔과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은 물론 전 세계 중앙은행의 수석이코노미스트들이 각 세션에서 경제 정책의 이론과 실제를 놓고 팽팽한 설전을 벌였다.

학술경연이 총회의 얼굴이라면 뒷면은 2만명의 경제학도들이 몰리는 거대한 채용시장이다. 사전에 채용신청을 한 국제기구와 각국 중앙은행, S&P와 무디스 등 국제신용평가회사들이 우수 인재를 뽑기 위해 혈안이 된다. 우수논문 발표자를 눈여겨보고, 인터뷰도 하루 종일 이어진다. 한국개발연구원(KDI)과 한국은행도 미국경제학회 연례총회의 단골고객이다.

사흘간의 총회가 끝난 뒤 행사장을 나오면서 작년 2월 서울 성균관대에서 열린 한국경제학회 공동학술대회장의 텅 비다시피한 회의실이 떠올랐다. 당시 박세일 서울대 명예교수는 “한 나라의 경제위기는 그 나라 경제학의 위기에서 온다”며 “학자들이 내놓는 연구가 얼마나 실천지향적이고 실사구시적인지 깊이 반성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미국경제학회 연례총회는 미국 경제가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질주하는 데 또 하나의 바탕이 된 미국의 ‘소프트파워’를 절감케 하는 행사였다.

이심기 뉴욕 특파원 s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