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은 “민주주의는 여태까지 시도된 모든 다른 형태의 정치체제를 제외한다면 최악의 정치체제다”고 설파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치른 1945년 총선에서 패한 2년 뒤 하원 연설에서 영국 유권자들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내비친 것이다. ‘나쁜 정책’이나 ‘나쁜 후보자’들을 뽑는 현대 민주주의의 역설적인 현상에 일침을 가한 말이기도 하다.

왜 민주주의는 '나쁜 정책'을 만들까
민주주의는 이상적인 정치체제로 인식됐다. 그러나 현대 민주주의는 수많은 ‘나쁜’ 정책을 양산하고 있다. 왜 민주주의는 나쁜 정책을 만들어 내는가. 정치인들은 왜 나쁜 정책을 제안하고, 투표자는 왜 나쁜 정책에 표를 던지는가. 이에 대한 설명으로는 투표자의 ‘합리적 무지’가 자주 언급된다. 그러나 투표자의 믿음은 합리적 무지에 더해 이상하게도 편향된 측면이 있다. ‘우연적 실수’가 아니라 ‘체계적 편향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투표자들은 자유무역의 경제적 혜택을 과소평가하거나 복지지출 효과를 과대평가하고, 포퓰리즘 정책의 결과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잠재성장률 저하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브라이언 캐플런 미국 조지메이슨대 교수가 “투표자들은 합리적 무지 그 이상이다”고 한 말을 새겨들을 만하다. 캐플런 교수는 2007년에 낸 책 ‘합리적 투표자의 미신’(사진)을 통해 투표자들은 “잘못된 믿음을 바탕으로 비합리적인 정책을 체계적으로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했다. 민주주의 하에서 ‘나쁜’ 정책이 채택되는 기저에는 투표자들의 ‘비합리성’이 도사리고 있음을 간파한 것이다.

임시직 일자리라도 많이만 만들면 좋다고 여기는 ‘인위적 일자리 창출 편향성’과 ‘반(反)생산 편향성’을 예로 들어 보자. 사람들은 경제 번영을 ‘생산(생산성)’이 아니라 ‘고용’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국가 전체로는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일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일자리의 양이 아니라 질을 따져야 한다는 얘기다. 그러나 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정치인들은 인기영합적인 엉뚱한 정책을 내놓기 일쑤다. 일자리를 늘린다며 주유소의 ‘셀프 주유’를 금지하는 미국 오리건주가 그런 사례다. 투표자의 편향성에 정치인은 잘못된 정책을 내놓아 표를 모으고, 다시 잘못된 정책이 확대 재생산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이는 대중민주주의의 맹점이라고 할 만하다. 합리적 무지가 ‘후보자나 정책에 관해 모르면 투표장에 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반면 투표자의 비합리성은 ‘후보자나 정책에 관해 잘못된 믿음을 갖고 투표장까지 가서 나쁜 후보자나 정책에 투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선무당이 사람 잡거나 반풍수가 집안 망치는 경우다. 투표자의 이런 비합리성을 빗대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2007년 6월14일자 기사에서 투표자들에게 “뇌 없이 빈 머리로 투표하라”고 하기도 했다.

세상은 복잡하기 그지없다. 대부분 사람은 자신과 관련된 중요한 일을 제외하고는 무관심할 수밖에 없다. 정치 분야도 예외가 아니다.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국회의장 이름과 정당의 대표 이름을 알고 있을까. 일부 정치학자는 ‘대중의 지혜’를 믿기도 한다. 다수결 제도 아래 보통의 투표자들이 임의적으로 표를 던진다면 정치에 관심이 많은 적극적 투표자들로부터 과반수의 지지를 얻는 후보자가 당선될 것이란 얘기다.

이런 원리는 다른 분야에서도 나타난다. 영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누가 백만장자가 되려 하는가’란 퀴즈 프로에서 방청석이 택한 대답의 정답률은 91%였다. 이는 대중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의미한다. 금융시장에서도 대중의 지혜가 적용될 수 있다. 수많은 투자자들이 예측하는 주가가 일부 전문가보다 더 정확한 때가 많기 때문이다. 정치 현장에서는 대중의 지혜가 통하지 않는다. 투표자들이 신앙에 가깝다고 할 정도로 체계적인 편향성에 근거해 표를 던지기 때문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 ‘정치 실패’에 대한 이야기가 언론에 자주 등장한다. 민주주의가 사회적으로 최적인 정책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의미에서다. 노무현 정부 시절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둘러싼 갈등과 이명박 정부 시절 미국산 소고기 ‘광우병 파동’으로 사회적으로 큰 비용을 치렀다. 이런 갈등의 배경에는 자유무역과 보호무역에 대한 사람들의 잘못된 믿음이 깔려 있다.

국제무역과 관련해 투표자들의 무지와 비합리성을 비교해 보면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우선 투표자들이 합리적으로 무지한 경우에는 ‘보호주의 정책’을 지지하는 결과가 초래되지 않을 것이다. 만약 투표자들이 자유무역에 대해서는 합리적으로 무지하며, 일부 투표자들은 보호주의가 가져다주는 혜택을 과대평가하고 다른 투표자들은 이를 과소평가한다면, 최종적으로 선택되는 정책이 보호주의 쪽으로 쏠리지는 않을 것이다. 보호주의의 혜택을 둘러싼 일부 투표자의 과대평가와 다른 투표자의 과소평가가 상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투표자들이 국제무역에 대해 비합리적이라면 그들은 보호주의가 가져다주는 혜택을 체계적으로 과대평가할 것이며, 그 결과 보호주의를 지지하는 편향성이 지배하게 된다.

비합리성에 매몰된 투표자들의 보호주의에 대한 체계적 과대평가는 정치인들로 하여금 포퓰리즘에 입각한 보호주의 정책을 취하도록 압력을 가할 것이며, 그 결과 ‘나쁜’(보호주의) 정책이 채택된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대표자인 국회의원들의 사익(私益) 추구 행동, 투표자들의 정치적 무지, 투표자들의 비합리성 등으로 인해 실패할 수 있다. 민주주의 하의 ‘투표자의 비합리성’은 정치적 무지 이상으로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지식의 급속한 발전과 글로벌 시장통합의 많은 혜택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반(反)시장, 반기업, 반무역, 반성장, 반자본주의 편향성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 합리적 무지에서 깨어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비합리적인 믿음이나 생각에서 탈피하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

뿌리깊은 경제분야 편향성

"경제는 지금보다 나빠질 것이다" 비관주의 성향 강해

왜 민주주의는 '나쁜 정책'을 만들까

경제 분야에 대한 사람들의 체계적 편향성은 뿌리 깊다.

대개는 ‘반(反)시장 편향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사람들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 기능을 믿지 않는 성향이 강하다. 일반인과 경제학자에게 석유가격은 왜 오르는지 물어본다고 가정하자. 일반인은 석유회사들의 탐욕이 석유가격을 인상시키는 주요 요인이라고 생각하는 게 보통이다. 경제학자들은 석유의 수요와 공급 법칙에 따라 가격이 오른다고 답할 것이다. 석유회사의 높은 이윤추구 때문에 가격이 오른다면 석유가격은 항상 오르는 게 맞다. 그러나 석유가격은 요즘처럼 급락할 때도 있다. 이런 경우 설명이 궁색해진다. 석유회사들이 더 낮은 이윤을 원하기 때문에 가격이 내린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반교역 편향성’도 보인다. 사람들은 외국 또는 외국인과의 상호작용으로부터 발생하는 거래이익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강하다. 국내에 들어온 동남아 이주자들이 자신의 일자리를 빼앗아 간다고도 생각한다. 이들 이주민이 값싼 노동력을 제공해 밑바닥 경제를 돌아가게 하는 주인공이란 사실을 애써 외면한다. 사람들의 이런 생각에 영합해 진보정치인은 자유무역을 반대하고 보수정치인은 외국 노동자의 국내 이주를 반대한다. 사람들은 또 미래 경제 상황이 지금보다 나빠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비관주의 편향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성규 < 안동대 무역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