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발유 공급가 이미 40% 인하"…정유社, 정부 압박에 불만 폭발
정부가 저(低)유가 혜택이 국민 모두에게 고루 돌아가도록 정유·석유화학 업계에 제품값 인하를 압박하고 나서면서 해당 분야 기업들이 고심하고 있다. 정유업계는 홀로 이익을 챙기느라 기름값을 천천히 내린다는 비난을 받는 데 대해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9일 산업통상자원부가 주최한 간담회에서 이 같은 고충을 쏟아냈다.

석유화학업계도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기초원료인 나프타 가격이 내렸다지만 석유화학제품 가격이 국제 시세에 연동되는 만큼 국내에서만 배짱장사를 할 수 없는데도 정부와 소비자들이 이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금이 휘발유값 인하 ‘발목’

지난해 국제유가가 반토막 났지만 국내 주유소의 휘발유 평균 가격은 L당 1887.37원에서 1591.98원으로 15.6% 내리는 데 그쳤다. 이 때문에 국내 정유사들은 “왜 기름값을 빨리 내리지 않느냐”는 비난을 받고 있다.

정유사들은 국제유가 하락 추세에 맞춰 기름값을 제때 내렸는데도 애꿎게 욕을 먹고 있다고 항변하고 있다.

정유사들은 지난해 싱가포르 현물시장의 휘발유 가격 하락에 따라 주유소에 공급하는 휘발유 가격(세전 기준)을 L당 841.99원에서 519.46원으로 40.8% 내렸다. 41.3% 떨어진 싱가포르 현물시장의 휘발유 가격 하락폭과 엇비슷한 수준이다. 업계 관계자는 “주유소 공급가는 국제시장 가격보다 L당 80~110원가량 높은데 이는 운송비와 마케팅비 등이 포함된 것으로 실제 마진은 크지 않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주유소 기름값이 빠르게 내리지 않는 것은 세금 영향이 크다는 게 업계 주장이다. 지난 8일 전국 주유소 휘발유 평균 가격은 L당 1558.9원. 이 가운데 유류세 등 세금은 934.56원으로 59.9%에 달한다. 김문식 한국주유소협회장은 이날 산업부 주최 간담회에서 “높은 세금 때문에 기름값 인하폭이 작아 보이는 왜곡현상이 생긴다”고 지적했다.

주유소들이 월 2~3회 정유사에서 기름을 공급받다보니 빠른 유가 하락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유통 구조상의 문제도 거론된다. 정유사에서 공급가를 내려도 주유소가 이익을 보기 위해 이를 반영하는 시점을 늦출 수 있다.

그럼에도 정유사와 주유소가 기름값을 일부러 천천히 내린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고 있다. 석유시장감시단 관계자는 “서울 등에선 주유소 간 휘발유 가격이 최대 20%까지 벌어져 있다”며 “모니터링을 한층 강화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석유화학 업체들도 ‘울상’

석유화학업계도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원유에서 추출하는 석유화학제품의 기초원료인 나프타 가격이 떨어져 원가 부담이 줄었지만 제품 가격도 함께 내린 탓이다. 그런데도 최근 정부로부터 제품값을 내려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석유화학제품 가격은 최근 1년 새 30% 이상 급락했다. 나프타 가격은 50.7%, 필름 섬유 등의 원료인 폴리프로필렌(PP)은 30%, 전자제품 케이스 등에 쓰이는 폴리스티렌(PS)은 39% 하락했다.

하지만 인하된 석유화학제품 가격은 의류 등 최종재값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원유→나프타→파라자일렌→테레프탈산’ 등의 중간 공정을 거쳐 만들어지는 나일론 원사가 등산복 등 의류값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고작 1~5%에 불과한 탓이다. 루이비통 등 명품 의류 가격이 유가 때문에 인하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얘기다.

업계 관계자는 “석유화학제품을 원재료로 사용하는 완제품 가격을 낮추려면 낙후한 유통시스템 등 다른 요인들을 점검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영태 기자 py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