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종말적 인구론의 유행
맬서스가《인구론》을 저술한 것은 1798년이었다. 산업혁명이 도시의 혼란스런 폭발과 농촌 인구의 감소를 초래하는 것을 목도하면서였다. 인구의 너무도 빠른 증가와 식량의 ‘너무도 느린 증산’을 우려하는 것은 당대의 관찰로는 자연스러웠다. 인간은 이렇게 스스로를 저주하는 것으로 ‘인류’라는 단위에 대한 사회관찰을 시작했다. 시간당 농업 생산이 일정하다면 인구 증가가 초래할 식량 부족은 필연적이다. 논쟁의 여지도 없다.

맬서스의 인구론은 나중에 프랜시스 골턴 등 많은 사회개량주의자들의 호응을 받았다. 사이비 진화론은 사회공학적 관념들과 대체로 맞아떨어졌다. 사회적 무능력자, 혹은 범죄자들을 불임화하는 우생학적 정책들은 그렇게 도입되었다. 인구 증가를 걱정하는 목소리의 현대적 결정판은 폴 얼릭이 쓴《인구폭탄(population bomb)》이다. 인간은 악으로 간주되었고 가난과 질병, 무질서와 혼란, 환경파괴와 자원고갈을 초래하는 총체적 문제군으로 선포되었다. 아니, 인간이 문제라니! 실로 어리석은 주장이었지만 유행을 탔다.

70년대가 되자 일단의 연구자들은 인구폭발이 미증유의 재난을 불러올 것을 우려하면서 인간사회가《성장의 한계》에 봉착할 것이라고 생떼를 썼다. 인구론은 이렇게 자본주의를 공격하는 무기로 둔갑했다. 이 저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서는 줄리언 사이먼의《근본자원》을 기다려야 했다. 인간만이 궁극의 자원이라는 사이먼의 선언이 있고서야 저주가 풀렸다. 박정희 대통령 정부의 산아제한도 폴 얼릭 식이었다. 그러나 박정희의 경제발전이야말로 인적자원의 증가와 적절한 교육훈련이 만들어낸 사이먼적 성공이었다

최근 또 하나의 스윙이 나타났다. 해리 덴트라는 경영 컨설턴트가 쓴《2018》이다. 이 책은 ‘인구절벽이 다가온다’는 종말적 부제를 달고 있다. 최근 국내 지식인들 사이에 빠르게 전파되고 있는 이 종말적 예언은 인구감소와 노령화를 그 핵심 논거로 삼고 있다. 늙어가는 사회에서 “소비하고 노동하며 투자하는 사람들이 사라질 것”이라는 비관적 예언은 쉽게 동조자를 얻고 있다. 최윤식의《2030 대담한 미래》도 유사한 논리다. 이 책은 ‘대한민국, 제2의 외환위기 거쳐 잃어버린 10년으로 간다’는 역시 종말론적 부제를 달고 있다. 그는 종말의 조건으로 기존 산업의 성장 한계, 종신고용 붕괴, 저출산, 고령화, 재정적자 위기심화, 성장률 저하, 부동산 거품 붕괴, 정부의 잘못된 정책, 심각한 사회갈등, 급격한 흡수통일의 10가지를 거론했다. 진부한데다 원인-결과를 혼동하고 있는 대목이 적지 않지만 인구동학적 저주만큼은 인구절벽론과 같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 이미 결정된 것은 무엇이며 얼마나 있을까.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ceteris paribus)”으로 시작되는 소위 논리적 귀결은 또 얼마나 논리적일까. 이대로 살다 죽자는 것과 이대로는 망한다는 주장은 어느 부분에서 다르고 같은 것일까. 물론 하나 확실한 것이 있다. 인간은 쓰레기통에서도 장미를 피워내고 황무지에서도 옥토를 만들어 내는 그런 존재다. 인간은 조건을 극복하는 존재이지, 조건 제한적 존재가 아니다. 적절한 인구 감소는 오히려 쾌적한 삶의 공간을 제공할 수도 있다. 고령화는 축복이며 각자의 삶을 풍부하게 만들어간다. 지금의 60대는 과거의 40대와 맞먹을 정도로 건강하다. 그들은 노련한 현장지식을 가진 자들이기 때문에 더욱 신중하게 과업을 수행한다. 충분히 늘어난 삶은 많은 서비스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당연히 다양한 새로운 산업을 자극한다.

그러니 종말론에 너무 놀라지 마라. 종말론은 언제나 틀려왔다. 그들이야말로 지금 알고 있는 조건들에 대한 작은 지식들을 짜맞추며 섣불리 미래를 예측하려 든다. 사회발전은 인간의 의지와 행동에 달려 있는 것이지 낡은 조건에 달려 있지 않다. 인생의 참된 의미조차 알기 전에 죽는 것이 문제이지 어떻게 오래 사는 것이 문제이겠는가. 이제 곧 봄이다. 어깨를 펴고 맞서 나가자.

정규재 논설위원실장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