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기부 나선 '원조 국민타자' 이만수 전 SK 와이번스 감독 "과분한 사랑에 보답하는 길, 저절로 힘이 나네요"
‘한국 야구의 전설’ 이만수 전 SK 와이번스 감독(57·사진)이 선수, 지도자에 이어 야구전도사로 인생 3막을 살고 있다. 지난해 11월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에서 19일간 머물며 재능기부를 한 데 이어 최근 경북 문경 글로벌선진학교(GVCS)에서 1주일간의 일정을 마쳤다. 경기 성남시, 일본 가고시마, 강원 강릉시 등에서 향후 일정도 줄줄이 잡혀 있다. 그는 “선수 시절 과분한 사랑을 받고만 살았다”며 “저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면 섬이든 오지든 외국이든 가리지 않고 달려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 전 감독이 야구 배트를 처음 잡은 건 14세 때다. 남들보다 앞서야겠다는 생각에 어려서부터 새벽 4시에 일어나 혼자 공터에서 연습을 반복했다. 직업군인이던 부친의 엄한 교육도 스스로를 강하게 다잡는 데 도움이 됐다. 그는 “경기에서 안타를 한 개도 못 치고 들어가면 ‘호랑이 이상사’로 불리던 아버지께서 도끼로 방망이, 글러브 등을 내리치시곤 했다”며 웃었다. 워낙 독하게 연습해 ‘독종’, 잠이 부족해 늘 양쪽 코에서 피가 터져 ‘쌍코피’란 별명이 붙었다. 대구상고, 한양대를 거쳐 1982년 한국 프로야구 원년 멤버로 삼성 라이온즈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홈런왕, 타격왕, 타점왕 등 타자로서 받을 수 있는 상은 모조리 휩쓸며 ‘원조 국민타자’로 활약했다.

그러나 그도 세월을 막지 못했다. 기량이 떨어지면서 벤치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고 결국 1997년 팀을 떠났다. “야구는 배트와 공을 절묘하게 운영하는 ‘점 대 점’ 게임입니다. 또 집중력이 굉장이 중요한 멘털 게임이기도 해요. 나이가 들며 심리적으로 위축되니 될 것도 안 되더라고요. 정상에 있다 그렇게 되니까 참 창피해서….”

도망치듯 한국을 떠나 미국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서 타격코치로 지도자 인생을 시작했다. 와신상담 끝에 1999년 말부터 시카고 화이트삭스 불펜코치로 6년여간 팀을 이끌었다. 여기서 그는 한국과 달리 ‘격의 없이 소통하는 방법’을 배웠다.

“한 선수가 선물이라며 ‘horny(뿔)’란 글자가 적힌 티셔츠를 선물해줬어요. 별 생각 없이 며칠 동안 그걸 입고 새벽에 달리기 운동을 했는데 모두 쳐다보는 겁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흥분한’ ‘호색한’이란 뜻이 있더군요. 게다가 구단은 품위손상이라며 정식 징계위원회에 회부하겠다고 했고요. 나중에 알고보니 구단주부터 선수까지 모두 짠 장난이었습니다. 이후 더 친해졌음은 물론이고요.” 이 전 감독은 2007년 SK 와이번스의 러브콜을 받고 수석코치로 금의환향했다. ‘호랑이’ 김성근 감독이 채찍이었다면 이 전 감독은 선수들을 껴안고 뽀뽀하는 등 당근 역할을 톡톡히 하며 팀의 화합을 이끌었고, 이는 3회 우승 등 팀의 전성기로 이어졌다. 2011년 감독을 맡고 나서는 팀을 2회 준우승에 올려놓고 2014년 은퇴했다.

이 전 감독은 야구 불모지인 라오스에 협회 설립과 함께 야구경기장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 방문 때 현지 체육부 전·현직 고위 관계자들과 만나 의미있는 대화를 나눴다고 했다. “개방을 시작한 나라가 세계에 존재를 빨리 알리는 데 스포츠가 가장 효과적이고 그중에 유력한 게 야구라는 점을 알려줬습니다. 야구가 단합 등 국민정서와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요.” 그는 또 산악인 엄홍길 대장이 이끄는 국제봉사단체 ‘엄홍길휴먼재단’을 벤치마킹한 ‘이만수열린재단’ 설립을 위해 백방으로 뛰고 있다. 활동비용은 사재를 털었다. 그는 “내 일이라면 못해도, 다른 사람들을 위한 일이다보니 저절로 힘이 나고 고개를 숙이게 된다”고 말했다.

이해성 기자 i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