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면산의 기운, 매일 10시간 단색으로 잡아내"
“1995년 이른 봄 붓을 처음 잡았던 날, 50여년 동안 가슴 밑바닥에 눌려 있던 열정을 캔버스에 폭발적으로 쏟아냈던 게 지금도 생생합니다. 몸 안에 있는 신비한 현상들이 색깔을 통해 분출하는 신기한 느낌이었지요. 아마 그때 무언가에 홀려 ‘색채홀릭’에 빠진 것 같았어요.”

국내 작가로는 드물게 오는 12월 중국 베이징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여는 중견 화가 김가범 씨(사진). 그는 자신의 미술세계 입문에 대해 “여태껏 꿈꿔 온 그림에 대한 열망이 극에 달한 상태에서 자연을 원색으로 잡아내는 게 내 몸속에 지닌 ‘끼’ 같은 것이었다”고 말했다.

1970년대 한국의 단색화 장르를 미국과 유럽 화단에 먼저 알린 김씨가 미술 정규 교육을 받은 것은 마흔 줄에 접어든 1990년대. 사업하는 남편을 따라 10여년간 머물던 미국 로스앤젤레스(LA)의 미술학교 ‘노스리지’와 ‘피어스칼리지’에서 공부했다. 초기에는 주로 파스텔 화풍의 꽃과 장미, 산을 그렸다. 하지만 곧바로 단색화에 빠져 인간의 소통과 치유 문제를 색채 미학에 녹여냈다. 박서보, 하종현, 윤형근 화백보다 단색화를 늦게 시작한 그의 작품은 독일 쾰른을 비롯해 스위스 바젤, 미국 뉴욕과 마이애미 아트페어에서 팔려나가며 단번에 유망작가군에 이름을 올렸다.

김씨는 이번 중국 초대전 주제도 ‘산과 색채의 마술’로 정하고, 산을 통해 색감이 흐르는 모습을 색면으로 승화한 30여점을 내보일 예정이다.

서울 우면산 기슭의 작업실에서 매일 10시간 이상 붓질에 매달린다는 작가는 “드라마틱하게 느껴지는 우면산의 꿈틀거림 속에는 다양한 색깔이 숨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제게 색은 우면산의 터럭이라 할 수 있는 초목과 살처럼 타오르는 흙의 아우라입니다. 여기에 바흐와 베토벤, 모차르트의 선율을 조화롭게 버무려 발레리나의 몸짓처럼 화면에 담아냈습니다. 국내 화단에서는 제 작품을 보고 ‘마운틴 컬러’ 또는 ‘선율의 회화’라고 부르더군요.”

실제로 그의 작품에는 색 덩어리들이 꿈틀거린다. 하지만 그에게 중요한 것은 색 덩어리의 미적 관계가 아니다. 오직 치유, 운명, 소통, 황홀 등 기본적인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는 요즘이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원 없이 그림을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50년 전 부모 몰래 혼자서 미대 입시를 준비했는데 부모님이 시집가라며 앞길을 가로막았지요. 반세기를 산 뒤에야 붓을 들었습니다. 그동안 가슴 밑바닥에 눌려 있던 열정을 마음껏 풀어낼 수 있으니 새로운 2막 인생이 열린 셈이죠.”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