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대학로 게릴라극장에서 상연 중인 ‘바냐 삼촌’을 보면서 그런 생각은 사라졌다. 체호프가 창조한 전형적인 인물들의 캐릭터가 생생하고 설득력 있게 다가왔고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작품의 희극성이 오감으로 느껴졌다. ‘체호프의 장막극은 지루하다’는 선입관을 깨줄 만한 무대다.
이윤택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이 연출하고 연희단거리패 특유의 신체적이고 양식화된 연기에 능한 배우들이 무대에 선다. 전체적인 이야기 구조와 극적 전개는 원작과 같다. 러시아 시골 영지에서 유모 마리나가 동네 의사 아스트로프에게 차를 따라주는 것으로 시작해 영지의 주인 소냐가 “쉴 수 있어요”란 말을 되풀이하는 것으로 끝난다.
무대는 그 중간을 한국적 정서와 리듬, 해학이 담긴 극적 리얼리즘으로 채운다. 제목부터 ‘바냐 아저씨’가 아닌 ‘바냐 삼촌’이다. 스스로 ‘못생겼다’는 소냐는 진짜 뚱뚱한 바냐를 ‘삼촌’이라 부른다. 아저씨보다 훨씬 정감이 있다. 절묘한 리듬과 호흡, 몸짓으로 조절되고 다시 쓰인 대사들은 어느 ‘바냐 무대’보다 사실적으로 들린다. ‘새똥 세례’ ‘분홍 립스틱 자국’ 등 예기치 못하게 튀어나오는 놀이성과 일부 인물의 신파조 대사와 동작, 우스꽝스러움은 사실성과 어우러지며 연극적 재미를 이끌어낸다. 조영진 이원희 이승헌 등 중견 배우와 박인화 황혜림 등 젊은 배우 간 연기 앙상블이 일품이다.
관객들은 120분간 배우들과 호흡을 같이하며 무대에 빠져들었다. 소냐가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며 “난 너무 못생겼어”라고 울부짖을 때 옆에 앉은 중년 여성 관객이 “아냐, 그렇지 않아”라고 혼잣말을 내뱉었다. 이런 객석의 반응이 관극을 방해하기보다 추임새처럼 작용했다. 커튼콜에서 배우들이 일제히 터뜨리는 큰 웃음에 관객들도 기꺼이 동의한 듯 따라 웃었다.
러시아 사실주의 대표작에 담긴 인생에 대한 통찰을 깊이 있게 표출해 내면서 무대와 객석의 일체감이 느껴지는 공동체적 정서까지 이끌어내는 공연이다. 거장의 솜씨라 할 만하다. 내달 15일까지, 3만원.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