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가 애창시 9편을 모아 쓴 10폭 병풍.
백범 김구가 애창시 9편을 모아 쓴 10폭 병풍.
‘지성통화약통신(至誠通化藥通神·지극한 정성은 조화와 통하고 약은 신과 통해), 원기쇠옹제병신(遠寄衰翁濟病身·멀리 노쇠한 늙은이에게 부쳐 병든 몸을 구제하려네), 아역유단군신부(我亦有丹君信否·내게도 단약이 있는 걸 그대가 믿겠는가), 용시환해수사민(用時還解壽斯民·이 약을 쓰면 백성이 장수하게 할 수 있을 것이네).’

북송의 유학자 정이천이 노인들의 건강을 염원하며 애절하게 노래한 시다. 조국 독립에 평생을 바친 김구는 이 시를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그는 1947년 임시정부 주석판공실에서 정이천의 시 등 애창시 9편을 10폭 병풍에 일필휘지(一筆揮之)로 몰아 써 한의사이자 독립운동가 최석봉에게 선물했다. 글씨가 뿜어내는 팽팽한 기운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김구의 글씨를 비롯해 추사 김정희, 한석봉, 정약용, 이황, 황기로, 허목, 이광사, 이항복, 송시열, 박규수, 유길준, 홍영식, 오세창, 김규진, 손재형, 유한지 등 조선시대부터 구한말까지 활동한 명사들의 친필과 편지, 애창시가 경매에 부쳐진다.

한국경제신문과 미술품 경매회사 서울옥션(대표 이옥경)은 오는 4~11일 유명 인사들의 글씨를 ‘우리 글씨 명품 100인선’이라는 제목으로 온라인 경매(제4회 eBID NOW)를 한다. 서울옥션 홈페이지(seoulauction.com)에 접속하면 24시간 누구나 입찰에 참여할 수 있다. 마감일인 11일 오후 2시부터 최종 낙찰자를 발표한다. 국내 미술품 경매회사가 글씨만을 모아 대규모 경매 행사를 여는 것은 처음이다.

이황 등 조선 중기 명현 50명의 시와 서간을 엮어 서첩으로 만든 작품이 경매 최고가에 도전한다. 1501~1595년에 활동한 학자와 정치가 문필가들로 허균의 형 허성과 허봉의 명문이 수록돼 있어 눈길을 끈다. 명필가이자 감식가로 유명한 오세창이 소장한 서첩으로 경매 시작가는 2억원이다.
추사 김정희의 글씨 ‘서론’. 서예의 기초를 묻는 생질 이생에게 청호필(靑豪筆)로 써준 글.
추사 김정희의 글씨 ‘서론’. 서예의 기초를 묻는 생질 이생에게 청호필(靑豪筆)로 써준 글.
추사체로 유명한 김정희의 글씨도 5점이 출품됐다. 세로 두 줄로 쓴 글씨 ‘문학종횡각천성(文學縱橫各天性·문학의 종과 횡은 천성대로이니), 금석각화신능위(金石刻畵臣能爲·금석에 새기는 일쯤이야 신이 할 수 있으리다)’는 뛰어난 조형성을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추정가 2000만~4000만원으로 추사의 강인한 기상을 엿볼 수 있다. 또 글씨 배우는 요령을 묻는 생질에게 써 준 작품(추정가 2500만~5000만원), 벽에 거는 현액 작품 ‘한종음관(寒宗吟館·3000만~5000만원), 두보의 시를 쓴 작품(1500만~3000만원)이 비교적 낮은 가격에 새 주인을 찾는다.

한석봉의 글씨 고시 ‘감지’.
한석봉의 글씨 고시 ‘감지’.
추사와 쌍벽을 이루는 서예가 한석봉이 당나라 시인 대숙윤의 시 ‘이당 산인에게(贈李唐山人)’를 쓴 ‘감지’(1000만~1800만원)와 ‘관산월’(1000만~1500만원), 유성룡의 서간문(500만~800만원), 이황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500만~800만원) 등 보기 드문 글씨도 경매된다.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온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은혜를 입은 사람에게 보낸 편지(1818년)도 추정가 1200만~2500만원에 나온다. 감사한 마음을 잊고 지내는 배은망덕한 처사에 참으로 부끄럽다는 심정을 토로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밖에 이승만 전 대통령이 1960년에 쓴 글씨, 조선 중기 당나라 시를 즐긴 백광훈의 시고(2000만~3000만원), ‘오성과 한음’이란 고사로 더 잘 알려진 이항복의 자작시도 춤품됐다.

이옥경 대표는 “이번 경매에서는 유명인의 글씨를 통해 서예사의 흐름을 개관할 수 있다”며 “작품마다 사료 가치가 크다”고 말했다. 출품작은 4~11일 서울 중림동 한경갤러리(20점)와 서울옥션 평창동 옥션하우스(80점)에서 만날 수 있다. (02)395-0330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