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원론에서 못 벗어난 범금융 대토론회
얼마 전까지만해도 기억했던 친구와의 약속을 깜박 잊는 바람에 곤란한 상황에 처한 적이 있다. 다행히 친구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며 이해해줘 별 탈 없이 넘어가기는 했다. 하지만 이런 실수가 특정 개인 수준이 아니라 인간의 기억과 사고체계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라면 정말 심각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뇌·인지 과학자인 개리 마커스 뉴욕대 교수가 인간의 뇌를 일종의 ‘클루지(kludge·비효율적이고 이해할 수 없지만 어쨌든 작동하는 장치)’라고 설명한 것이 맞다면 말이다. 쉽게 말하자면 인간의 뇌 속에는 작동이 제멋대로인 애물단지 정보처리기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이 컴퓨터처럼 최적화되지 않은 뇌가 엄청난 양의 연산처리를 하다 보니 사고를 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는 설명이다.

‘금융의 백팔번뇌’라는 제목으로 보도됐던 지난 3일의 범금융 대토론회 내용을 보고 우리 금융시스템 전체가 ‘클루지화’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들었다. 우선 금융당국 수장들과 각 금융회사 최고경영자(CEO)가 108명이나 참석했다는 토론회치고는 내용이 빈약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불과 7개월 전에 금융위원회가 발표한 금융규제 개혁방안에 나와 있는 내용을 어떻게 실행할 것인가를 토론하는 것이 백번 나을 뻔했다. 대통령의 브레인스토밍 주문에 부응한 관제 토론이란 비판을 받을지라도 사상 처음으로 금융계 CEO가 모두 한자리에 모여 토론을 한다는 취지만은 살려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대한민국 금융의 길을 묻는다’는 거창한 주제에 비해 토론회 내용은 그동안 금융권이 지속적으로 요구해 온 금융규제 완화, 과도한 검사 개선 등 미시적 주제에 그쳤고, 금융당국의 태도 또한 달리 변한 것이 없어 보였다.

첫술에 배부를 수야 없겠지만 적어도 한국 금융의 구조적인 문제점과 근본적인 개혁 방안에 대한 뼈아픈 성찰과 반성은 있어야 했다. 낙하산 인사가 되풀이되고 CEO 임기가 매우 짧아서 장기적 안목의 책임경영이 어려운 후진적인 지배구조에 대한 언급은 한마디도 없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지속되는 저성장 기조에서 누적된 기록적인 부채구조를 헤쳐 나갈 방안과 수익모델을 확보하기 위해 새로운 소비자와 시장을 개척해 나가는 창조적 혁신은 보신주의에 묻혀서인지 논의조차 되지 못했다.

정부가 지난해 11월부터 16개 민관유관기관 합동으로 ‘IT·금융 융합협의회’까지 운영해가며 올해 최대의 정책과제로 내세운 ‘핀테크(금융+기술)’에 대해서도 금산분리, 실명확인 등 절차적으로 선결해야 할 문제는 손도 대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모바일을 통해 소상공인을 대상으로 대출사업을 하는 ‘온덱’과 온라인으로 개인 대 개인(P2P) 대출사업을 하는 ‘렌딩클럽’이란 미국의 핀테크 스타트업 기업들은 지난해 뉴욕증시 상장에 성공한 데 그치지 않고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며칠 전 렌딩클럽은 미국 구매자들의 원활한 거래를 위해 중국의 전자상거래 업체인 알리바바와 제휴를 맺어 렌딩클럽에서 대출받은 돈으로 알리바바에서 판매되는 물품 비용을 지급하게 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선진 금융의 메카라고 할 수 있는 월스트리트가 이미 신개념 금융사업을 하는 스타트업 기업들을 제도금융권으로 불러들였다. 그런데도 한국은 아직 금융권이 국민 경제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고 강력한 규제개혁을 추진하겠다는 금융위원장의 각오성 발언이 고작이니 걱정이 안 될 수 없다. 마커스 교수가 중요한 순간에 엉뚱한 데 마음이 가 있는 인간의 숙명적 맹점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누군가가 우리의 결정을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며 결정을 하라’고 한 제언은 적절해 보인다. 클루지적인 인간의 사고체계를 극복해 나가듯 금융당국은 온 국민이 지켜보고 있는 데 대해 두려움을 갖고 범금융 대토론회에서 나온 논의들이나마 생산적으로 활용하면 좋겠다.

이인실 < 서강대 교수·경제학 insill723@sogang.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