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세계일주
책상 위에 놓인 지구본을 돌릴 때마다 손가락이 간지럽다. 손끝의 감촉이 마음보다 먼저 설렌다. 지축(地軸)의 기울기만큼 23.5도 정도 고개를 젖히고 보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커피 산지를 따라 세계일주를 떠난 선배 커플이 참 부럽다. 편백나무 향기 사업을 접고 더 큰 일을 찾겠다며 지난해 떠난 후배는 지금쯤 어디를 걷고 있을까.

여행이란 생각과 시야를 넓히는 공부의 여정이다. 17~18세기 영국 등 유럽 귀족 자제들이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돌며 문물을 익히던 그랜드 투어(Grand Tour)도 ‘젊은 날의 긴 여행’을 통해 ‘일생의 지성을 쌓는’ 과정이었다. 토머스 홉스와 존 로크, 애덤 스미스 등 근대 유럽 사상가들이 이를 통해 지식과 지혜를 나눴다.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도 마찬가지다. 시계처럼 정확한 영국 신사가 유럽과 아시아, 미주를 돌아오는 여로에서 예상치 못한 난관들을 극복하며 생각의 전환을 이루는 얘기가 아니던가.

글로벌 투자자 짐 로저스는 새로운 투자 대상을 찾기 위해 두 번이나 세계일주에 나섰다. 1994년 펴낸 월가의 전설 세계를 가다는 6대륙 52개국 10만마일을 22개월 동안 모터사이클로 돌아 기네스북에 이름을 올린 얘기다. 1999~2002년에는 부인과 함께 116개국 15만2000마일을 여행해 또 기네스북에 올랐다. 이 때 한국에도 보름이나 머물다 갔다. ‘썰물이 시작되면 누가 알몸으로 수영하고 있는지 알게 된다’ 같은 투자 격언들을 이런 여정에서 체득했다.

요즘은 세계일주 여행객들의 콘셉트가 많이 달라졌다. 음악과 미술 등 특정 문화 장르를 중심으로 하는 ‘예술파’부터 요리, 와인, 커피 등의 ‘먹자파’까지 각양각색이다. 요리 중에서도 빵이나 과자, 아이스크림, 파스타, 해산물 등으로 더 세분화한다. 지역 역시 전 세계를 모두 도는 ‘두루파’와 한 대륙에 집중하거나 강·산맥을 죽 따라가는 ‘집중파’ 등으로 전문화하는 추세다. 나홀로 배낭족은 물론이고 친구나 연인, 가족, 동호회 멤버들과 함께하는 사례도 많다. 허니문 세계일주 또한 인기다.

각 항공사의 세계일주 티켓을 이용하면 여비를 아낄 수 있다. 자전거나 모터사이클로 움직이는 마니아족도 급증하고 있다. 숙소는 잠자리와 음식을 외국인에게 서로 제공하는 카우치서핑(couchsurfing.com)이나 에어비앤비(airbnb.co.kr), 자전거 여행 전용 웜샤워스(warmshowers.org) 등으로 다 해결한다. 참 좋은 세상이다. 나는 지구본만 더 세게 돌리고 있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