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 칼럼] 동생들이 역사를 바꿨다…둘째를 낳자
‘종의 기원’이 출간된 1857년,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유럽 지식인 사회는 찬반양론으로 확연히 갈렸고, 격렬한 논쟁이 시작됐다. 반대 세력들은 공개적으로 야유를 쏟아냈다. 찰스 다윈의 주장은 허위이고, 과학적 오류이며, 의도 자체가 불손하다고 말이다.

프랭크 설로웨이라는 심리학자가 종의 기원 출간 당시 논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일일이 분석했다. 놀라운 결과가 도출됐다. 다윈의 주장을 격렬히 반대한 사람들 대부분은 맏이, 열렬히 지지한 사람들 대부분은 후순위 출생자였던 것이다. 후순위 출생자들이 진화론을 지지할 확률이 맏이들보다 9.7배 더 높았다는 결론이다. 우연한 결과가 아니다. 출생순서에 따른 이 같은 차이가 우연히 생길 확률은 10억분의 1에 불과하다.

맏이는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부모의 관점을 수용한다. 힘의 유지에 신경을 쓰느라 타성에 빠지고, 그래서 보수적 태도를 갖는 경향이 크다는 것이다. 반면 첫째에 맞서 반항적으로 성장한 동생들은 개방적이고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성향이 자연스럽게 형성된다는 것이다. 설로웨이의 결론은 과감하다. “반항적인 동생들이 역사를 바꿨다.”

무리하게 진화론과 출생서열을 연결시킨 것일까. 설로웨이는 이런 방법으로 종교개혁 프랑스대혁명 등 121개의 역사적 사건과 코페르니쿠스혁명 상대성이론 등 28가지 과학 혁신을 조사했다. 이 논쟁에 개입된 6566명의 전기적 자료를 분석했다. 결론은 같았다. 870쪽 분량의 역작 ‘타고난 반항아(Born to Rebel)’의 내용이다.

한국의 합계출산율이 1.19명이다. 15세부터 49세까지의 가임여성 한 명이 평생 낳는 아이의 숫자다. 당연히 첫째만 있는 사회다. 출생률 저하가 큰 문제라지만, 맏이만 있는 사회의 부정적인 측면이 그 위험을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다는 분석이다. 사회에 활기가 떨어지고 변화의 바람이 잦아드는 것은 단순히 고령화 탓이 아니라는 것이다. 노동력 감소의 부작용보다 혁신의 기회가 줄어든다는 위험이다.

다윈은 프랑스 사람들이 왜 이토록 진화론을 믿지 않느냐며 불평을 늘어놓았다고 한다. 답은 둘째의 부재였다. 진화론 출간 당시 유럽 과학자 평균 형제 수는 2.8명이었지만, 프랑스 과학자들의 평균 형제 수는 1.1명에 불과했던 것이다. 프랑스가 18세기 유럽의 산업화 과정에서 후발국가로 뒤처진 것은 인구가 제자리걸음을 한 탓이라는 건 증명된 사실이다.

맏이의 변화 기피 성향이 문제가 된다지만, 외둥이는 알다시피 더 심각한 응석받이다. 경쟁할 형제가 없으니 의존적이 되고, 자기중심적이 된다. 게다가 어른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한다. 3대 심리학자로 출생서열을 집중 연구한 알프레드 아들러의 설명이다.

외둥이 사회의 부작용은 중국에서 찾아볼 수 있다. 34년 산아제한 정책 탓에 조부모에 외조부모, 부모, 그리고 한 자녀로 가족이 구성되는 ‘4-2-1 포메이션’이 일반적이다. 샤오황디(小皇帝)들은 더 없이 행복하다. 가만히 있어도 ‘4-2’의 모든 것이 다 제 것이 된다. 도전이 필요 없다. 한국도 다를 게 없다.

잘나가는 선진국은 둘째가 있는 사회다. 미국이 그렇고, 유럽 주요국이 그렇다. 일본처럼 둘째가 없는 사회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대기업에 취직해 힘들게 살 이유가 없다. 아르바이트나 하면서 휴대폰 게임에 몰두할 뿐이다. 나라는 절망을 향해 가지만, 젊은이들은 오히려 희망이 없어서 행복하다고 답한다. 지금을 즐길 뿐이라는, 소위 ‘사토리(깨달음) 세대’다.

입만 열면 복지를 떠드는 정치인들이다. 웃기는 사람들이다. 이런 추세라면 2750년이면 아예 국민이 소멸된다는 데 말이다. 한국의 최대 위기는 바로 저출산이고, 둘째의 부재다.

한 자녀는 어떻게든 키울 수 있다. 첫째부터 무상 시리즈를 적용한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셋째가 있으면 더 좋겠지만, 낳으라 낳으라 해도 쉽지 않다. 낳지도 않는 셋째를 지원해 봐야 헛일이다. 둘째를 낳는 집에 다 몰아주자. 예산이고, 제도적 지원이고 말이다. 재앙은 벌써 저만큼 다가왔다. 동생이 필요하다.

김정호 수석논설위원